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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8.12 - 8.20




청년,
독일통일을 인터뷰했다
HELLO~




옛동독 시절 신호등,
암펠만(AMPELMANN)
C a tr1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h pe .
                       £ 독일의 통일과정 개괄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 동독시민혁명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슈타지 박물관,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 동서통합과 새로운 희망 : 프라우엔 교회

                       <쉬어가기> 길거리 100인 인터뷰




C a tr2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h pe .
                      _ 과거사 인식과 성찰

                      £ 독일의 과거사 개괄
                      £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
                      £ 테러의 토포그래피, 유대인 학살기념공원




C a tr3 8.15 광복절 기념행사
 h pe .
                      £ 영상 제작 의미
                      £ 8.15 기념 마라톤 스케치



깨알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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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둘러보기> "여기는 꼭 가보세요~!!"
£ 맥주맛 쫌 아는 재현군이 소개하는 독일의 맥주
£ 독일에서 식비 아끼는 법
£ 값싸고 질좋은 숙소를 소개합니다




Y 4 e c 마무리 한마디
 PPae
C a tr1
 h pe .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4
£ 독일의 통일과정(개괄)

1. 동독 공산정권의 자체 붕괴

○ 1989년 5월 2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철거한
 것을 계기로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이 시작.
○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
 으로 촉구하고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비밀회합에서 소련군의 동독시위 불개입 방침을 천명한데
 이어 주 동독 소련대사가 시위의 유혈진압은 안된다고 경고.
○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성당에서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서독 TV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 10월 6일에는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참가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전국 규모로
 확산되고 1989년 중 46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
○ 동독 공산잔당들과 개혁세력들은 동독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원탁회의를 구성하여 국정을 운영
 하는 한편,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서독
 기민당의 제휴정당인 「독일연맹」이 승리.


2. 동독주민의 서독편입 결정

○ 4월 12일 로타 드메지어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4월 19일 드메지어 총리가 서독 기본법 23조
 (기본법 적용지역 규정)에 의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함.
○ 통일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5월 18일 사회경제화폐통합조약을 체결되고 8월 30일 통일
 조약 체결, 9월 20일 동ㆍ서독 의회의 통일조약 비준, 10월 2일 동독의회의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소멸 의결 등을 거처 10월 3일 통일을 달성함.


3.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확보

○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1월 28일 서독정부는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한 후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약속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외교에 착수했음.
○ 소련에 대해서는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대폭축소(66만 5천→37만), 대
 규모 경제원조(철수비 지원 90억 달러, 매년 34억 달러의 소련군 주둔비용 부담) 등을 약속하
 는 한편, 미국과 협조하여 소련을 압박하면서 2+4 회담을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동의
 를 확보함.


4. 체제통합 과정

○ 서독체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되 동독인들의 적응을 위해 일부 법규정의 적용은 1~3년간 유
 예하고 동독의 행정체제를 서독 체제로 개편함.
○ 화폐통합, 동독 국유재산의 매각(2,564억 마르크 적자), 서독 사회보장 제도의 동독으로의 확
 산, 반 법치국가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 공산치하에서의 피박해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경제
 ㆍ사회 통합을 추진했음.




                            5
5. 독일통일의 성공 배경

○ 직접적 요인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 정책, 소련의 동구포기, 동독의 개혁 촉구.
 –동구권의 개혁 및 민주화 혁명 열풍.
 –공산정권에 대한 동독주민의 염증 확산.
 –동독의 경제 파탄.
 –동독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 결여.
 –미국의 적극적 지원.


○ 간접적 요인


 –서독이 동독주민의 동경대상이 되었다는 점.
 –원칙을 고수한 서독정부의 정책
 –동독주민의 「삶의 질」개선에 중점을 두었던 서독의 대동독 정책.
 –동독주민의 서독 TV 시청.
 –주변국의 신뢰 확보.




£ 통일 이후 동․서 통합 과정에서 독일 사회의 주요쟁점

1. 정치경제

○ 통일 방식
 -정치적 의미에서 통일은 ① 한 국가가 어느 한쪽의 헌법을 받아드리거나, ②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 서독 기본법 23조 ①의 방식, 서독 기본법 제146조는 ②의 방식이다.
 -제23조에 따른 통일은 ‘통일을 위한 빠른 길이나 흡수통일의 길’
   제146조에 따른 통일은 느린 길이지만 동서독이 대등한 관계에서 새롭게 출범하는 국가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


○ 화폐통합
 -동독시민들을 위한 통일열기 조장, 동독주민의 이주 억제, 동독 정부의 요구 등의 이유들로
  동서독 화폐 1:1 교환. 동독 경제가 순식간에 300% 평가 절상된 화폐가치로 세계시장경쟁에
  내던져지면서 동독 경제 순식간에 붕괴.


○ 신탁청에 의한 국유재산 매각
 -「인민 소유 재산의 사영화 및 재조직에 관한 법률」 을 바탕로 신탁청이 민영화 추진 기관
  화 됨. 재정이 고갈된 동독정부의 재정마련 방안.
 -1994년 까지 1만5000개 이상 기업, 4만5600건 이상, 6만 7000헥타르의 토지와 산림이 매
  각됨. 대부분 서독인들이 구입




                            6
○ 재산권 방환청구 : 반환이 배상에 우선한다.
 -서독인들이 과거 동독지역에 갖고 있다 몰수당한 재산에 대한 권리회복을 인정한 재산권 반
  환 청구권은 통일독일 정책의 실책으로 꼽힘.
 -220만권의 소송이 진행됨. 동독 총 면적보다 많은 면적이 소송에 걸림.


2. 사회문화


○ 동독엘리트 숙청
 -‘인권 및 법치국가의 기본원리’를 훼손시킨 경우 비정상적인 해고가 가능하도록 규정
  슈타지 등 동독정치체제에 물든 사람들 숙정가능. 인적 재편의 과정에서 동독 엘리트들의 심
  각한 반발.


○ 과거청산
 -슈타지는 동독 질서를 유지하는 기간 조직으로 민중들의 원성을 사게 되면서 체제의 붕괴를
  가져옴. 슈타지 희생자들이 그동안의 억압과정을 확인하고 복권과 보상을 요구함.
 -그러나 동독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감시자가 되고 또 감시의 대상이 되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복잡성이 존재.


○ 동서독 주민간의 이질감
 -차이의 핵심은 서독인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동독인들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의 차이.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부터 가치를 둘러싼 지식인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남.




                             7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8.13, Berlin)




                              ‣ 왼쪽 위, 기념식중 장벽관련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행사
                              ‣ 왼쪽 아래, 분단과 관련한 퍼포먼스



1. 베를린장벽의 역사
 <설치>
 - 독일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베를린 장벽 구축은 1961년 8월 12일과 13일 사이
   의 새벽에 발생
 - 사회주의 통일당 지도층이 동베를린과 동독으로부터 서베를린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 구축
   지시
 -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오려다 숨진 이들은 1961년 8월 24일 구엔테 리트핀을 시작으로
   1989년 2월 6일 크리스 구에프로이까지 적어도 136명으로 추정 (정확한 수는 논란중, 희생
   자 가족단체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상황)


 <철거>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부터 28년이 지난 1989년 11월 평화혁명으로 장벽 철거.


2. 관련기사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 베를린 장벽
- 연합뉴스 박창욱 특파원 2011-08-13 23:16


13일(현지시간) 정오 독일 수도 베를린시 도심이 일순간 정지했다.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 시스템은 1분간 운행을 멈췄고, 거리의 시민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
의 시간을 가졌다. 때맞춰 곳곳에서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평소보다 명징하게 들렸다. 자정부터
베를린시 `화해의 교회'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발각돼 숨진 이들 중 136명의 전
기가 낭독됐다. 베를린시는 또 야외 영화제를 열고 베를린 장벽을 따라 소재한 역사적 장소를 찾



                                  8
는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베르나우어 거리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건설 5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
를린 장벽은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3주 휴가를 마치고 첫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메르켈 총리는 "장벽 건설이라는 부당성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내외에서 자
유, 민주주의, 인권 등에 대한 지지를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목사의 딸로 서독에서 태어난 메르켈
총리는 가족이 동독으로 이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동독에서 보냈다. 그녀는 "그때 나는 7살이었는
데 장벽 건설이 우리 가족에 가한 테러를 기억한다. (장벽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사촌, 조부모와
만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1989년 이 끔찍한 장벽의 붕괴에 우리 독일인들
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더욱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이민자들이 사회 통합할 수 있도록 돕고 시민들이 자신의 잠재력
에 완전히 이를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독일 내 자유를 더 신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50년 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것은 세계가 자유와 민주주
의를 지지한다는 것을 회고해주는 상징물"이라며 "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죽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동독 정권은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61년 8월 전장 155㎞의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앞서 동독 주민 1천900만명 중 2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
졌고, 매일 3천명이 매일 서독으로 넘어갔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9일 갑작스런 붕괴를 맞
을 때까지 28년간 동서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장벽 일부가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
며, 베를린시는 역사적인 보존을 위해 장벽 해체 20년 만에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50주년 냉전 최전선서 철거 뒤엔 ‘양극화 상징’
-한겨레 정의길 기자 20110814 20:32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13일로 50주년을 맞았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
되며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 붕괴의 봇물이 됐으나, 그 전 28년 동안 동서냉전의 최전선으로 존
재했다.


베를린시는 이날 장벽이 세워졌던 베르나우어가에서 기념식 등 여러 행사를 열었다. 클라우스 보
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은 이날을 최근 역사에서 가장 슬픈 날로 기억하고 있다”며 “장벽
은 역사가 됐으나,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장벽은 이를 만든 사람들의 공포의 표현이었다”
며 “이 장벽이 상징하던 당시의 세계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
유는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장벽도 결국 자유의 의지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
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13일 동독 당국에 의해 철조망으로 처음 만들어진 뒤 나중에 160㎞ 장




                             9
벽으로 진화됐다. 탈출자들을 막으려는 300개의 감시탑도 세워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뢰도 심어
졌다. 동독 당국은 장벽을 ‘반파시스트방어 성벽’이라고 부르며, 파시스트 서방을 막기 위한 장벽
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장벽은 이제 철거돼 일부 지역에서 역사적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나, 부유한 서쪽과 가난한 동쪽을
가르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동독 교사 출신으로 여전
히 동베를린에 살고 있는 브리기타 하인리히는 통일 이후에도 “내가 지금까지 사귄 서독 사람들
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댈 수 없다. 정말로 그들과 사귈 수 없다”며 통일 이후 상황에 아직도 적응
할 수 없음을 고백했다.


3. 느낀 점 by 이준호


‘장벽 설치를 기념한다고?’ 처음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행사 일정을 계획할 때 이 행사에 대해
선뜻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장벽을 철거한 것이 아닌 설치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기념
식에 직접 참여했을 때야 비로소 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역사의 아픔을 기
억함으로써 정치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책임의식을 고취시켜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행사를 기획한 인사들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15일
방문 예정인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의 설립 취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불프 대통령, 보베라이트 시장 등 각종 정치 인사들의 기념인사와 함께 행
사에 참여한 독일인들은 모두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
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온 몸으로 분단의 아픔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 준 바로 이 장면!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했던 이 이벤트는 남한의 한 여성 청년의 멘트로 마무리 되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독일 시민들이 겪었던 분단의 아픔이 아직 우리나라(Korea)에 남아 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소중한
첫째 날, 첫 행사였다.
                                                    by 준호


                           10
£ 라이프치히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시민들의 통일운동의 기억저장소' (8.18, Leipzig)

라이프치히에서의 아침,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라이프치히에서 제일
번화한 지역을 향했다. 번역을 맡아주기로 한 최선화씨와의 만남, 그리고
구 동독지역의 통일 시민운동의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는
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체어맨과의 인터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다세대 주택의 한 건물로 들어선 우리는 나선형의 폭 좁은 나무 계단을
총총히 밟고 2층, 3층을 올랐다. 곧 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작은 간판이
걸린 흰색 현관문이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곧 환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은 라이프치히 시민운동 기록보관소.


체어맨인 Uwe Schwabe 씨와의 만남,
짧은 소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Schwabe 씨: 이 건물이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시민운동기록보관소는 정치적, 문화적 통일이 이
루어지고 난 199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동독 시절에는 구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여기서 신문,
기사들을 썼지요. 공산주의 때 이런 활동들은 금지되었기에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웠고, 그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자료들이 여기에 보관되었습니다. 다른 곳에도 기록 보관소가 있지만 그 시기의 자
료는 이곳에만 있습니다.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자료를 넘기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곳
에만 자료를 맡겼습니다. 당시 동독정부는 자료를 다 없애버리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곳에는 보관
을 할 수 없었지요.
이곳은 정치적인 분위기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자료는 무엇이던지 확인이 가
능하고 최근 5~8년 간 자료만이 아니라 DDR시절에 유대인과 외국인에 관련한 전시회도 하고 있
습니다. 1989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통일과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학생들을 상대
로 한 방문교육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체어맨,
               Uwe Schwabe 씨




                               11
Q. 기록운동보관소가 언제 생겼는지요?
A.(Schwabe씨) 1990년도 가을에 기획하여 1991년 5월에 생겼습니다.




                                     ‣ 인터뷰중인 독통참가자들(오른쪽에서 2번째가 통
                                      역해주신 최선화씨)



Q. 이곳은 통일 이후에 설립되었는데요. 통일 이전에 동독의 활동과 시민운동 내용을 보관하는 이유와
  기록을 보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세요.
A. 공산주의 서기장이 어떻게 살았는지, 공산주의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어떻게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었는지, 데모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지금의 정치에도 도움이 되고 시민들의 운
  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이곳에 대한 책도 쓰고, 역사가들도 많이
  와서 동독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있지요. 영국, 오스트리아 등에서
  도 연구자들이 와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연구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이
  곳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도 그 시절(구 동독)에는 찍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요. 이것은
 1989년에 일어난 800명이 모인 시민운동 사진입니다. 12명이 저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 사람
 들은 다 감옥에 갔지요. 500미터를 걸어가는데 사람들은 다 처벌받고 끌려갔습니다.




                        ‣ 1989년 1월 15일 평화시위




                                12
Q. 기록보관소 중에서 라이프치히에서 유독 자료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A. 막데부르크, 드레스덴, 폴란드 인접 도시, 베를린, 핸더스부르크에도 기록보관소가 있습니다.
  주요 주마다 각자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각 지역의 하이라이트 자료는 해당 지역에서 보관하
  고 있지요. 기록보관소에 대해서 정부가 하는 것은 없었고, 각 주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 곳
  으로 통합할 수 없어서 시민들이 각 주마다 여기 저기 만들었지요.(*독일은 연방제 국가라서
  중앙정부보다 주정부의 역할이 크다)
 동독지역의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Neues Forum(노이스 포럼)에서 시민들끼
 리 논의했습니다. 평화시위 후 3개의 단체라 결성됐는데, 민주주의 하려는 사람들, 노이스포럼,
 평화와 인권 관련 단체 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3개의 그룹이 90년도에 하나로 합쳐졌고 하
 나의 당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이것이 녹색당입니다.
 동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서독에서는 방송이 되고 있었고, 동독에서도 몰래 티비를 설치
 해서 서독의 방송들을 같이 봤고 그런 정보들이 시민운동에 힘이 되었습니다. 동독 내에서는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서독 방송을 몰래 보고 정보
 를 얻어서 동독 내의 다른 지역에서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동독 사람들이 몰래 서독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서독에 넘어간 사람들이 동독에 대한
 자로들을 작성했습니다. 처음 공산당을 반대한 사람들이 운동한 것은 통일을 위해 했다기보다
 자기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지요.


Q. 시민운동 기록보관소인데 구 동독시절 위주의 자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도 시민들이 시위를 하
  거나 할 텐데 그것도 이곳에서 보관을 하시는지요?
A. 이제는 정부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공개
  로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곳은 역사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 동독에서 시위에 사용되었던 인쇄물




                           13
Q. 동독의 시위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는데 라이프치히는 동독 내 어떤 위치였나요?
A. 박람회가 1년에 2회 봄, 가을에 일주일동안 열려서 세계적으로 오픈된 곳이었습니다. 동독인
  들도 박람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요. 이곳에선 공업에 관한 행사가 많아 세계 여러 나라와 도
  시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좋은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었지요. 특히 우리가 지지지 못한 것
  들을요. 라이프치히에는 특별히 공업품이 많아서 다른 도시에는 무엇이 있는지 볼 기회가 많
  았거든요.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에너지를 많이 생산했어요. 공업 화학 공장들이 아주 많거든
  요.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채굴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 힘든 노동의 연
  속이었고 삶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DDR(구 동독정부)의 반
  대 세력과 국민들이 합세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위할 때 나눠준 종이에 모임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어요. 좀 전에 사진에서 본 12명이 만
 들어서 나눠주고 그들은 감옥에 갔지요. 남은 한 명이 설명하고 시민운동을 주도했고요. 종이
 를 받은 시민들이 그 모임을 해냈습니다.
 슈타지에서 발견해서 가지고 온 자료에는 12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서명운동을 서독에서 했다
 고 합니다. 자매도시인 하노버에는 1월 15일 동독이 시위했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신문에서는
 사람들이 유치하게 방해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시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전단지 종이와
 현수막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이동하여 체어맨은 우리를 기록보관실로 안내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앵글로 쌓아 올린
기록 보관 책장들, 그 사이에 가득 쌓인 기록상자들이 인상 깊었다. 그 상자들에 가까이 다가가니
상자마다 날짜와 장소가 꼼꼼히 타이핑된 라벨지가 붙어 있었다.




          ‣ 기록보관소(1)                  ‣ 기록보관소(2)



Schwabe 씨: 베른린 벽이 무너졌을 때, 구동독의 정치인들은 동독제도가 좋다는 내용으로 새로운
당을 세웠지요. 그 당의 이름에 똥이라는 글자를 써서 반대 운동을 한 깃발이 있지요.(*체어맨은
자랑스럽게 그 현수막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2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현수막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14
‣ 1989년 1월 시위에 등장한 현수막과 피켓



시민들이 Neues Forum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들은 파일로 보관되어 있어요. 이 포럼은
동독에서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1998년 도시 폐허에 대한 사진전도 했지요.


슈타지 자료도 조금 보관하고 있습니다. 슈타지는 라이프치히에 어떤 단체가 있는지 조사하여 이
를 기록했어요. 종이 전단지 배부를 한 시위자 2명 중 한 명에 대한 슈타지 기록이 파일 한권으
로 작성되었습니다. 통일 후에 그 시위자 본인이 이곳 기록보관소에 기증했지요. 이 분은 1989년
5월에 서독 쾰른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동독을 떠났습니다.




‣ 슈타지가 작성한 기록들.



Q. 이 곳의 운영비는?
A. 작센주에서 50000유로, 라이프치히에서 10000유로(이는 집세로 사용)를 지원합니다. 기획서
  를 작성하여 여러 단체에서 프로젝트를 받지요. 매년 프로젝트를 신청하고 있으며, 국가기관이
  아니므로 후원이나 프로젝트비가 고정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5
22년 전 라이프치히 거리에 휘날렸을 현수막을 보여주며, 그 때의 추억에 잠겨 자랑스럽게 설명해주던
Schwabe 씨의 즐거운 표정이 생생하다. 더 나은 삶 그리고 자유와 개방된 삶을 원했던 시민들의 힘.
그것은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에 꼭 닮아있었다. 세계 박람회의 개최로 세계에 열려있던 개방도시
라이프치히. 이곳의 시민들은 다양한 국가와 도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은
개방에 대한 싹을 튀우고 있었다.




     ‣ 기념품 전달             ‣ YP4Peace 방명록 작성

Schwabe 씨에게 한국에서 미리 포장해 간 선물(해태모양이 그려진 나전칠기 명함집)을 전달하고
단체사진을 찍으면서 라이프치히 기록보관소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참! 선물을 전달하면서 벌
어진 작은 에피소드, 해태모양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전통문양 중 “악마”라고 소개를 한 것.. 급안
색이 나빠진 Schwabe 씨...ㅋ 급히 정정해서 마귀를 쫓아주고 복을 불러주는 동물이라고 다시 수
정했다는 후문...^^




                                                     by 지영




                            16
£ 라이프치히 슈타지 박물관 (8.18, Leipzig)

1. 슈타지 박물관 내력1)

과거 라이프치히 주변 구역의 슈타지 비상통제본
부였던 슈타지 박물관은 라이프치히에서 동쪽으
로 30km 정도 떨어진 마셰른(Machern)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슈타지가 활동할 당시에 이
건물은 라이프치히의 생활용수 공급과 상하수도
관리를 담당했던 VEB라는 국영기업이 소유한 레
크레이션        시설로      위장되었다.         건물의       핵심은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어진 벙커이다. 동
독 사회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슈타지 본부의 ‘기
동성’이 요구되면서 120명의 직원과 2명의 KGB
(소비에트 비밀요원) 연락담당요원이 라이프치히 ‘룬데 에케(Runde Ecke)' 건물에서 마셰른으로
이동했다. 비상통제본부는 비밀리에 지어져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슈타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마셰른의 벙커는 구(District) 단위의 슈타지 비상통제본부 중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있는 곳이
다. 이 특화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시민위원회 문서들은 슈타지의 군사활동과 ‘긴장과 기동성’
케이스에서의 기능을 알려주고 있다.


전체 대지면적은 5.2헥타르이고 현재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모든 내부장식을 포함한 건물과
설치물들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가이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
어떻게 공급 시스템이 작동했는지, 어떻게 뉴스들이 동독에서 생산되었는지, 핵무기 공격에 대비
해 슈타지가 작성한 생존전략 등을 알려준다. 전시회는 라이프치히 구역 내의 ‘이동’계획과 이 계
획들에 비상통제본부가 개입한 사실을 보여준다.


2. 슈타지 박물관 가이드

현재 슈타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최초
1906년 유대인 보험회사(라이프찌히 보험회사)에서 세운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았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이 소
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1945년까지 미국인이 소유하
고 관리했다. 소련은 이 건물을 동독 내 중앙본부로 1950
년까지 사용했고 1950년에 슈타지가 창설된 이후 1989년
까지 슈타지가 사용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슈타지와 경
찰이 함께 상주하게 되면서 이 건물 옆에 새로 건물을 지
                                                           ‣ 슈타지 박물관 설명듣는 YP4peace
었는데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53&L=1



                                                   17
슈타지는 동독의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를 이끌던
SED(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사회
주의통일당)2)가 관리했다.




베를린에 슈타지 본부가 있었으며 라이프치히 지부 역시 베를린의 관리 아래에 있었다. 1989년에
슈타지 요원은 총 9만1천명으로 창설 당시 6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로 조직이 커
진 셈이다. 특히 라이프치히에는 2401명의 요원과 1만 명의 보조요원이 활동했다. 당시 구동독의
인구가 1,600만 명, 라이프치히의 인구가 53만 명이었음을 볼 때 상당한 수준의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슈타지의 상징은 방패 위에 총이 놓인 그림이다. 총은
소련이 개발한 칼라슈니코프이다. 총의 상징처럼 슈타
지 요원들은 유사시 군인처럼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 슈타지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
시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시절이었고 동독지역보다는
서유럽 쪽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별다른 지침 등이 정
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슈타지에 일하는 요원들은 군인과 비슷하여 자유의사로 그만둘 수 없었다. 정년까지 일하든지 군
대로 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당시 동독의 학생들은 7학년이 되면 슈타지 요원으로 활동할지 결
정할 수 있었는데 학생 본인과 부모, 선생님과 논의한 뒤 부모가 동의하고 서류에 서명하면 나중
에 슈타지에 배치되어 활동했다. 이 때 슈타지에서는 생계보조, 지위보장 등의 당근을 던지며 지
원자를 모집했다.


2) 1946년 10월에 독일의 소련 점령지구로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병하여 성립했다. 그리고, 서쪽 점령지
   구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대로 존속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찬반를 결정하는
   투표를 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는 소련군에 의해서 투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던 것은 서베
   를린의 당원뿐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과의 통일에 찬성한 표는 불과 12%였기 때문에 통일사회당 성립 후에도 일정
   기간 사회민주당이 존속했다.(서베를린의 사회민주당이 동 베를린에서도 활동이 허용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베를린
   에는 서베를린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통합 후, 최초에는 지도부의 반씩이 구 공산당과 구 사민당이었지만, 구 독일 사회민주당계의 당원은 서서히 제명되어
   실체는 공산당 이었다. 단지 1946년 당시 존재하고 있던 정당으로서는 독일 최고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국에 강력
   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하는데 있어서의 이용가치는 매우 높았다고 여겨진
   다.(통합 당시, 공산당원이 60만명에 비해, 사회민주당은 68만명이었다. 사회민주당 쪽이 우세하였다.)
1949년 소련 점령지구가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면서, 국가를 지도하는 당으로서 사실상의 일당 독재체제를
   시행해, 동독을 지배하였다.
1989년의 민주화와 통일로 정권을 잃어, 통일사회당/민주사회당(SED/PDS)을 거쳐 민주사회당(PDS)으로 개
   명했다.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 등과 함께 연합해 공산주의 계열의 좌파당으로
   통합되어 연방 의회 제 4당으로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특히 구 동독에서는 뿌리 깊은 지지를 받고 있
   는 것 외에 구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_%ED%86%B5%EC%9D%BC%EC%82
   %AC%ED%9A%8C%EB%8B%B9



                                          18
슈타지 조직 내에는 여러 하위부서가 있었는데 각각 도청, 도촬, 우편물 검색, 환경단체나   교회
목사 감시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편물 검색을 하며 귀중품을 발견할 경우 몰래 갈취하기
도 했다. 사실 이러한 우편물 내 금품 갈취가 있었던 데에는 기계의 도움이 컸다. 편지봉투 뜯은
흔적을 없애는 기계와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우편물을 감시하는 효율이
급격히 늘었다. 매일 2,000여 개의 편지를 검사했으며 특히 서방 쪽으로 가는 편지는 영원히 보
내지지 않았다. 시민들 역시 꾀가 늘어 일단 동독 주소로 편지를 발송한 뒤 그곳에서 다시 목적지
로 편지를 발송하는 등 여러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 편지봉투 흔적 없이 뜨는 기계.            ‣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

슈타지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체제를 위협할 만한 요소를 세세하게 감시했다. 이를 위해 첨단
감시물품이 발달했다. 소련의 스파이요원이 사용하는 장신구 혹은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등을
들여오고 서독에서 도청장치를 사와 동독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기계를 활용하는 방법 외에
도 개의 후각을 활용하여 냄새를 이용해 요주의 인물을 추적했다. 이를 위해 경찰서에서 ‘의심스
러운’ 개인을 미리 소환한 뒤 옷의 조각이라든지 머리카락 등 냄새를 채취해 보관한다. 이를 개에
게 기억하게 한 뒤 차후에 감시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다행히(?) 법정에서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증거라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목하는 인물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혀 당사자를 정신
적으로 힘들게 만들곤 했다. 이런 상황을 조장하여 평정심을 잃게 한 뒤 경찰서에 불러 조사를 하
면 슈타지에 유리한 결과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 있어
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회유나 협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제2, 제3의 대책이
있어서 잠을 못 자게 한다든지, 외부와 통하는 모든 연락을 끊어버린다든지 하는 방법을 써서 어
떻게든 괴롭게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일단 혐의가 있어 갇힌 사람들을 절대 물리적인 고문을 가
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 감시를 위해 냄새를 채취해 놓음.




                          19
‣ 슈타지 분장에 쓰인 도구.        ‣ 두 번째 단추에 녹음기가 연결되어있음.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평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
던 일부 시민이 슈타지 건물 안으로 진입하여 자료를
확보했다. 30여 명 중 1명은 이제 시민이 슈타지를 통
제할 수 있다며 발코니로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도시
곳곳에 방송을 하기도 했다. 당시 건물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분위기에 눌려 별 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이 30여
명은 슈타지가 보유하던 자료를 확보했다. 이 때 분노
에 휩싸인 일부 시민은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
록된 자료에 혐오감을 느껴 파쇄기를 설치하고 자료를
없애기도 했다.

1992년 이후에 슈타지가 갖고 있던 문서에 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첫째, 누구나 이 문
서를 볼 권리가 있다. 둘째, 그 당시 정치범들의 복권에 관한 내용(정치범들에게 부당했다는 확인
서), 셋째,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등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 감옥에 갔던 사람
들에게 확인서를 줬다. 과거 구동독시절 감옥에서 나오면 석방된 카드를 받는데 그것은 일종의 낙
인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동독시절 공적기구에 근무한 사람들 경력을 전부 조사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는데, 현 공직선거에서 이 검증을 전제로 했다. 만약 슈타지에 부역한 것이 드러나면
그 지위를 박탈했다. 슈타지 밀정을 했던 기록이 발견되면 현직 선생을 해직시키는 방식이다. 슈
타지에서 시민들은 감시한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이었는데 실명을 추적해서 밝혀냈을 경우
동일한 방식으로 해고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사실 통일 직후에는 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
결정됐다. 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
자가 과연 ‘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
에서는 피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
리기도 한다.


구동독에서는 1987년까지 사형제가 존속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슈타지 내에서 총 64
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다. 사형선고의 사유는 1) 동독에서 서방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20
탈출하려다 발각, 2) 어린이 살해 등 사상적, 정치적인 이유가 주를 이뤘다. 잘 알려진 단두대(기
요틴)도 있었는데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1968년까지만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뒤에서 머리를 총으
로 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건물 내에는 사형당한 이들의 유골, 재를 모아 둔 장소가 있다. 당시
사형당한 이들의 가족에게는 사망사실만 통보될 뿐 사망의 원인이나 이유 등이 일체 알려지지 않
았다.


3. 관련자료


“처벌보다 화해”… 동독 슈타지 비밀문서 공개제한
250만명 감시기록 보관… ‘피해자’ 확인돼야 열람

“처벌보다 화해와 통합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7일 기자가 방문한 독일 연방 슈타지(동독의 국가공안국) 문서관리청의 요아힘 푀르스터 청장은
“문서 공개는 피해자가 요구할 때와 공익성이 인정될 때만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슈타지는 동독의 비밀첩보기관으로 나치보다 더 지독한 1800만 동독 주민의 감시망이었다. 푀르
스터 청장에 따르면 슈타지엔 공식 직원 9만5000명과 ‘민간인 끄나풀’ 18만9000명이 있었다. 슈
타지 문서는 약 30만 명에 이르는 정보원이 동독 시절 내내 수집한 국민 감시기록인 셈이다.


통일 당시 동독 주민이 가장 먼저 탈취하고 보존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발한 동독 라이프치히 시의 ‘월요 평화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름트라우트 홀리
처 여사(67·여)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라이프치히의 슈타지 건물을 보여주며 “당시 시위대가
감시문서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점령했던 건물이 바로 이곳”이라고 설명했다.


슈타지 문서관리청이 보관 중인 기록물은 인쇄 문서만 옆으로 늘어놓으면 114km에 이르는 엄청
난 분량이다. 사진 140만 장, 녹음파일 3만1000개, 필름과 비디오 2705개도 함께 보관돼 있다.
전체 250만 명에 대한 감시기록물로 보관 선반만 1만5500개다.


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통일 직후엔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 결정됐다.


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자가 과연
‘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
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리기도 한다
고 푀르스터 청장은 덧붙였다.


통일 독일 정부는 또 사회 통합을 위해 통일 직전 서독에만 슈타지 정보원이 4만5000명 있는 것
으로 파악했지만 통일 이후 적발된 간첩행위 3000여 건 중 82명만 기소하고 실제 처벌은 23명만
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라이프치히=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Inter/3/02/20100923/31363500/1



                                          21
£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8.18, Leipzig)

1.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3)

시민위원회는 평화혁명 중 설립되어 현재 룬데 에케 기념박물관과 슈타지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시민위원회의 주요 목표는 사회주의 독재시절의 기억을 보존하고 정치교육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
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시민위원회는 과거사 재평가와 공공의 의견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는 슈
타지와 그 후신의 실제, 구조, 관계 등의 개인적, 정치적, 법적, 역사학술적 재평가를 알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룬데 에케 기념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장하고 있는 내용에 영향을 받고 흥미를 느끼는
장소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열린 대화의 장으로 발전해왔다. 협회는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희생
자에게 조언하는 역할과 함께 학자, 학생, 기자, 영화제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요청하는 연구자
료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




2. 인터뷰이 : 트라우트 홀리처 여사



나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곳 슈
타지 박물관에서 20년 간 일했다. 슈타지 박물관은 사립단체로서
독립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재정은 빠듯하지만 시민운동의 상징
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원활하게 운영되었으면 바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거쳐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독지역에서 첫 시위가 일어난 곳은
1953년의 라이프치히였다. 이후 각지로 번져 베를린에서는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경찰이 시위를 진압했으나 이후 소련군이 개입하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시위 이후 슈타지가
주모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맡았고 이때를 계기로 슈타지의 규모가 증가하게 되었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이후 동독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항의하는 사람
들은 총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 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었는데 가방 등
소지품에 부착하거나 지니고 다녔다. 학생 중 일부는 농기구 마크를 들켜 체벌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자 동독 당국 역시 집요해졌다. 시위정보를
캐내기 위해 핀셋으로 쓰레기통을 뒤지며 우편물이나 종이를 일일이 검사하기도 했다




3)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02&L=1



                                                   22
‣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총
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
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어 소지품에 부착하거나
지니고 다님.


1985년 여름, 헝가리를 통해 서독 지방으로 탈출을 시도한 움직임이 있었다. 시민들이 직접 행동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며 동독을 나
가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청원했다. 그러나 어떤 정부기관도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고 청원서에 서
명한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세계 여러 국가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개최
중이어서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속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5월,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투표하지 않으면 집에 찾아와 압력을
넣거나 협박하는 등 부정선거의 양상을 띠자 시민들은 개표장에 몰려가 항의했고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1989년 6월에서 7월, 한 환경단체에서 항의데모를 준비했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인쇄할 필요
가 있었는데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지방에 가서 종이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교회에서 많이 도
와주었다. 그러나 준비하던 중 83명이 잡혀갔다. 여러 가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와중 중국의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아 동독 시민들의 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당시 동독 정부는 젊은이들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석하는 것조차 경계했다. 노래의 멜
로디와 가사를 통해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 89년도 시위에 젊은이들이 기타를 가지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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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시민 5,000여명이 시위 후 행진했다. 이 행렬은 1주일 후 20,000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의 참여가 점점 조직화되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슈타지는 적극적으로 나서 시민들을
탄압했다. 그냥 길을 걷던 시민들을 강제 연행하여 이들의 눈을 가리고 밤에 차로 이동하여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마구간과 같이 외진 곳에 갇혀 맞거나 협박을 당했다. 슈타지는
위의 마구간처럼 사람들을 잡아와 협박하고 어르며 통제할 목적을 가진 외진 곳들은 이미 1967년
부터 물색했다.


1989년 10월 9일, 모든 주요도시에서 평화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즉각 한 번만 더 시위를 할
때 무력진압을 예고했으나 시민들은 20,000명이 모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경찰이 시위 현장에 도
달했을 때 ‘90,000명이나 모였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모였고 경찰들은 진
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슈타지 역시 진압 여부에 대해 베를린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연락은 오
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이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경찰은 진압할 명분도 없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 중 흥분하여 경찰을 건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놀라
운 일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평화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대규모 시위 이후 정부는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여행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했
고 샤보프스키 공보비서는 그 효력이 언제부터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하
며 장벽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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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청년평화기획단(청년): 본격적으로 시위 등 시민운동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트라우트 홀리처 여사(홀리처): 나는 목사의 딸이다. 부모님은 동독에 대해 한 번도 좋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10학년까지 학교에
    서 공부했다. 이후 대학에는 가지 못했고 책을 제작하는 일을 하고 성악을 공부했다. 현
    재 4명의 자녀가 있으며 내가 부모님에게 교육받은 것처럼 나도 자녀들에게 동독을 비판
    하고 반대하는 교육을 했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이후 슈타지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자유를 위
    해 싸우는 일은 잠시만 손을 놓아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일을
    했다.
    현재 과거 시민운동의 과정과 역사를 알리는 전시를
    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보
    고 느낀 것들을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전시
    때 1,000명 넘게 방문했고 이 반응에 힘입어 행사를
    더 크게 해야겠다고 느꼈다. 일어난 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지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89년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89라는 숫
    자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 진행중인 전시회를 직접 소개해주고 있
                                      는 홀리처 여사님.

청년: 처음 시위를 기획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는가? 그리고 이후 통일을 경험
   한 20년간 어땠는지 궁금하다.


홀리처: 시위를 기획하며 작은 일과 사건들을 겪으며 재미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법의 테두
    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끌려가는 건 두려웠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두려
    워서 ‘아니오’라고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는 것은 내게 너무나 중요했다. 장벽이 없어져
    야 한다는 바람을 항상 갖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는 계속 행복하다. 그러나 개중에는 더
    어려워진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동독 시절이 훨씬 더 나았어.”라고 한다.
    나는 통일 이후에 학교교육이 달라진 것이 너무 좋다. 여행, 소비, 건강의 자유를 얻어서
    좋다. 옷 입는 자유, 책 읽는 자유, 사상의 자유, 자유의 세상이 온 게 너무 좋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핵무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는 것은 위
    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


홀리처: 여기에 덧붙여 남북관계에 대해 조언을 하고 싶다. 교류가 무척 중요하다. 감옥에서만 살
    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라이
    프치히처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25
£ 성 니콜라이교회 (8.18, Leipzig)

1. 성 니콜라이 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창설되었다. 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
의 교차점에 건설됐으며, 중세에 있어서 상인들의 수호신인 니콜라이에게 봉헌됐다.
지금도 이 교회는 시내 중심의 상가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원래 니콜라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었으며, 서편의 외관은 지금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
다. 16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양식의 홀식교회로 증축이 됐으며, 현재에도 교회 외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3개의 탑은 17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내부는 아주 매력적이
며, 그것은 건축사도트에 의해서 프랑스 양식을 모방한 의고주의4)적 양식으로 1784년에서 1797
년에 걸쳐서 완전히 개장됐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자신의 문화의 고귀성을 세계에 보여주기를
원했다. 특히 종려나 양으로 만들어진 기둥은 아주 인상적이며, 천정과 2층 의자에 마련된 풍부한
장식이 주의할 만하다.


당시의 화가 외서(A.F Oeser)는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교회의 현관과
제단에 있다. 제단 위에 있는 평화의 천사 모티브는 대단히 진귀하다.
153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이 행해진 이후 이 교회는 개혁교회로 변해 예배를 보게 됐다.
1723년~1750년에 걸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서 교회음악의 활동을 한
때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바흐의 주요한 작품들이 여기서 초연이 됐다. 1858년~1862년에 걸쳐
서   바이센펠스 출신의 라데가스트가 오르간을 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르간 중 가장 중요
한 작품이며 20세기에 공기순환의 전통화로 현대화됐다.


2. 1989년 가을의 경험, Pfarre C. Fuhrer(휘러 목사)
    (출처 : 니콜라이 교회 내 인쇄물)


"니콜라이 교회-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는 1989년 가을에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침내 구동독 전 지역의 사
람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출국을 요청하는 사람,
호기심을 가진 사람, 반정부 분자, 비밀경찰들, 교회관계자, 공산 당원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이들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벌려진 팔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9년~1989년 사이
에 정치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던 것
                                                    만나고 싶었으나, 목사님 사
입니다.
                                                    정으로 못 만난 휘러목사님.


라이프치히에 종교개혁이 행해진 바로 450년,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176년 후 다시 이 도시는 역
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89년 이후 니콜라이 교회에 통하는 거리는 경찰에 의해서
규제되고 봉쇄됐습니다. 이 후에는 라이프치히에 통하는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의 출구는 광범위하
게 경찰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또한 평화의 기도 시간에도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동독 정부 관


4) 예술 작품의 표현에서, 고전적 작품의 양식을 본뜨려는 주의. 고전주의(古典主義). 상고주의(尙古主義)



                                  26
리들은 평화의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적어도 니콜라이 교회에서 교외로 옮기도록 우리들에게
압력을 강화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평회 기도회와 관련된 체포 또는 임의동행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2000석이 꽉 차도록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운명의 10월 9일이 다가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폭력에 의한 진압이
군대, 전투요원, 경찰 그리고 사복경찰들에 의해서 획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 7일, 동독
의 건국 40주년 기념의 날, 동독 역사에서 국민 애도의 날로 모든 행사가 벌써 시작이 된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에 10시간 동안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무저항,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트럭
으로 이들을 날랐습니다. 이 중에 수백 명은 마르크클레베르크의 마굿간에 감금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무력을 갖고, 결국은 이 ”
반동 혁명”을 끝내야 하며, 진압해야 한다- 그래서 10월 9일은 험악했습니다. 약 1000여 명의
공산당원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벌써 오후 2시경에는 교회의 중간에 약 600명이 교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규칙
적으로 기도에 수 없이 참석한 비밀경찰의 임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들도 동시에 교회의 이야기, 복음의 말씀과
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수많은 비밀경찰들이 월요일마다 와서 산상수훈에 행복론을 듣는데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이것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관
련이 없는 모르는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을 공산당원을 포함해 모두가 듣게 됐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지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
"고 말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지 "적대자를 말살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그는 "첫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 "모든 오래된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조심 걱정하라고 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셨지, "너희는 크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는 믿지 못할 정도의 정숙과 집중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즉 주교의 축도가 있기 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 마스어 교수의 호소문
을 낭독했습니다. 즉 비폭력을 위해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중에서 쌍방의 공통점, 교회와 예술, 음악과 복음간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회는 주교의 축도와 인상 깊은 비폭력의 요구로 끝이 났습니다.
예배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자(나는 이 광경을 일생 잊을 수가 없는) 광장
에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과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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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는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서는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들고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비폭력주의의 예수님 정신은 대중을 사로잡아 실재적이고 평화적인 힘으로 변했습니다. 군인, 전
투부대,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철수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상대
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
대한 기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폭력의 운동은 단지 몇 주 밖에 유지되지만, 당의 독재와 지배적인 세계관을 붕괴시켰습니
다. 예수님은 권력자를 왕좌에서 넘어뜨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높이십니다. "군대와 권력으
로 아니고 주의 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의 중심부와 거리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어지지 않았습니
다. 비폭력의 안에서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에 속
한 진더만은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준비했다. 단지 촛불과 기도 외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니콜라이 교회에 실업문제 대책 이니셔티브가 생겼
습니다. 이렇게 니콜라이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
                                                      희망의 집,
                                           피난처와 출발의 장소로
                                     - 퓌러 목사(Pfarre C. Fuhrer)


3. 관련자료


(중략)
그런데 이 도시의 한복판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 교회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1980년부
터 당시 해마다 증강되는 서독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의 기
도회’가 열리면서 부터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9년 10월9일에는 기도회를 끝마친 2000여명의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일통일을 외치면서 결국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되었
던 것이다.


그 후로도 ‘평화의 기도회’는 계속 열려 전 세계의 가난과 질병, 파괴되는 환경, 그리고 전쟁과 핵
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해내자는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교회의 입구에는 여기를 찾아오
는 방문객들이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28
그런데 라이프치히에는 이처럼 교회의 사회 참여를 보여준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영성
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성 토마스 교회도 있었다. 두 교회는 봉사와 영성,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세상 속으로’ 와 ‘하늘을 향하여’로 기독교 복음의 양축을 대변하며 신앙의 균형을
보여주는 것이 이채로웠다.
(후략)


출처 : http://www.e-radiokorea.com/board/bbs/board.php?bo_table=column_kim&wr_id=24&page=3


무엇이 독일의 무혈통일을 가능케 했나
-김기석 목사


분주한 일정을 쪼개어 라이프찌히를 찾은 것은 괴테나 실러,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발자취를 더듬
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어앉은 성 니콜라이 교회를 보고 싶었기 때문
이다. 사회주의가 흔들리고 있던 1980년대, 그곳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토론하던 이들의 숨결
을 느끼고,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던 광장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새겨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 곳곳에서 공권력과 시민들이 충돌하는 현실이 없다면 그 먼 곳까지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머물고 있던 베를린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도시였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은, 22년 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의 성공 사례를 눈으로 보고 또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앙역을 지나 상가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가는데 문득
니콜라이 교회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던 경찰들과 시민들의 긴장된 모습을 머리에 그려졌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성 니콜라이 교회가 서 있었다. 중세부터 상인
들의 수호자로 숭앙되었던 성 니콜라이를 기념하기 위해 116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되어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었고, 3개의 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 정문에 서는 순간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
다. 독일의 많은 교회가 사용하는 문구이긴 하지만 성 니콜라이 교회이기에 이 말은 강렬하게 다
가왔다.


지치고 상한 영혼,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주님의 품이 절로 느껴졌다. 이 문
구는 냉전 시대에 니콜라이 교회가 감당했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성 니콜라이 교
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
를 개최했다. 이 연약한 기도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열
린 교회’라는 입간판은 한국에서 찾아간 내게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
는지를 언중유골로 들려주고 있었다. 고난받는 이들의 피난처 구실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떠올라 둔중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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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종려나무 모양의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회중석을 지나 제단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을 제단 위로 초대합니다"라는 안
내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가장 거룩한 자리라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여타의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되었다. 제단 좌우측 벽면에 그려진 외저(A.F. Oeser,
1717-1799)의 성화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펠릭스 파이퍼(Felix Pfeifer, 1871-1945)의
부조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젠체하는 내색 없이 마치 안방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
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제단에 오르기 전 회중석에서 보아 제단 우측면에 놓인 나무 십자가
를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1980년대 초반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를
위한 열흘" 기도 모임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십자가, 다만 한복판에 촛농
이 흐른 자국만 남아 있는 십자가는 암울한 현실에서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반대편 벽면에 부착된 16세기의 십자가 고상과 더불어 전통과 현
대의 아름다운 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창조적
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제단 바로 위 천장 가장 높은 곳에는 평화의 천사가 무지개를 손에 쥐고 있는 외서의 그림이 눈
길을 끌었다. 외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사역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예비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를 구입해 불을 밝힌 후 회
중석 한 가운데 놓인 촛대에 올려 놓느라니 저절로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을 밝히고 몇몇 사
람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둠이 짙었던 시기, 복음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
던 크리스치안 퓌러 목사와 1989년의 시위를 목도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 참극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민중들 편에 서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이끌었던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의 세계적
인 지휘자 쿠어트 마주르(Kurt Masur), 그리고 신학자 침머만(Zimmermann)박사가 그들이다. 그
들은 동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다운 의미의 지성인들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세속적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그들이야말로 믿음이 무엇인
지를 보여준 증인들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기도회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
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해도 평화를 향한 갈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안담당자는
조직에 속한 700여 명의 사람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좌절되고 말았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목
사를 통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세속사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그 가르침은 그들
의 가슴에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필연은 언제나 우연의 옷을 입고 등장하게 마련이다. 인
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다는 바울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1989년 10월 9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다. 평화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3000여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 니콜라이 교회, 성 토마스 교회, 성 요한네스 교회를 가득 채
웠다. 민주화의 수확기가 도래한 것이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고, 개혁 교
회에서는 한스 유르겐 지버스(Hans-Jürgen Sievers) 목사가 좋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
기에 이르는 길이 옳아야 하고 사용하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며 비폭력을 호소했다.


성 토마스 교회는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했고, 몰려든 이들을 향해 리히터




                               30
(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언 25장 8-9절("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
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
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라")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
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다.


성 미카엘리스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날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한
게르트 크룸프홀쯔(Gerd Krumbholz) 목사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용기의 결여와 두려움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했
다.


무혈혁명은 이렇게 마련되고 있었다. 광장과 길거리에는 이미 70,000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
었다. 그들은 유리 창 하나 깨지 않았다. 1989년 10월 9일은 비폭력 저항운동 역사에 도 하나의
이정표가 놓이는 날이 되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은 결국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라이프찌히 중앙 위원회의 치안 책임자였던 밀케(Mielke)는 죽기 직전에 "우리는 만
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으나 기도와 촛불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날의 무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 광장 곁에 세워놓은 대리석으로 만든 종려나무 기둥 조
각은 어떤 경우이든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 광장
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 교회의 오르
간 연주와 지휘를 맡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이 들려오는 듯 했다.


‘주여, 이 땅의 영예로운 통치자여!
당신의 수난에 의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어느 때에도 최적의 시기에도
찬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라이프찌히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새삼스럽게 길을 묻고 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
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출처 : http://well.hani.co.kr/52704




                                                      by 청춘개미




                                    31
£ 독일 화합과 희망의 상징,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독일통일기행 5일째날,



세계 2차 대전 당시 도시의 90%이상이
파괴되었던 드레스덴을 가보았다. 드레스
덴은 "독일의 피렌체"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궁전과 고전양식의 건물들이
많았고, 강가를 따라 이어진 테라스에서
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드레스덴을 방문한 목적은 이러한 아
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라우엔교회(Frauenkirche)를 방
문하여 교회 목사님과 동서독 통일 후
교회 재건을 주도했던 시민을 만나 인터
뷰하는 것이었다.



 프라우엔교회는 세계 2차 대전 후 통
일 전까지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89년 통일 후에는
시민들이 주도한 교회 재건으로 인해 독
일의 화합과 희망을 상징하게 되었다.




                             32
‣ 세계2차대전 후 파괴된 프라우엔교회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라우엔교회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부서진 건물 잔해를 주
                              워 번호를 매겨 각자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는 것은 꽤 알려
                              진 이야기다.




                              ‣ 추모의 십자가
                              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불탄 후 무너진 잔해 속에 남아있던
                              꼭대기 십자가. 불에 녹아 모양이 일그러졌지만, 이 십자가는
                              현재 전쟁에 대한 반대와 용서의 의미를 담아 프라우엔교회
                              내부 한켠에 보존 및 전시 중이다.




프라우엔교회가 지금과 같이 온전한 모습을 하게 된 데에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힘이 컸다. 독일통
일기행을 준비하던 중 프라우엔교회 복원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아닌 시민들의 간절한 바
람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구 동독지역의 드레스덴을 방문해 전쟁 후 분단 당
시의 상처와 분위기를 보고자 했던 우리는 프라우엔 교회를 방문하여 인터뷰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를 맞이해주신 분들은 1990년부터 현재까지 프라우엔 목사로 계시는 Holger Treutmann목
사님과 Citizen Action Group의 멤버로 통일 후 "Appeal from Dresden"을 만드신 Köckeritz 박사
님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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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중이신 Köckeritz 박사님


Köckeritz 박사님은 구 동독 시절부터 건축가로 일하셨는데 특히 역사적 건물 재건에 주로 관여
하셨다고 한다. DDR시절부터 프라우엔교회는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당시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15년 넘게 프라우엔 교회를 비롯한 주변 건물 복원에 대한 토론과 회의는 계속되어
왔었다. 80년대 동독은 프라우엔 교회와 주변 건물을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것이자 상징하는 것임
에 합의 발표하고 복원이 언제 진행될지 모르지만, 주변 지역의 개발을 제한했다. 프라우엔교회는
드레스덴을 가로지르는 엘베강의 곡선을 따라 마을 광장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거리가 연결되고, 강 건너 뿐 아니라 마을 어디에서나 교회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중요한
곳이었다. 교회는 도시 건축적 관점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작센주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큰 교
회 건물 중 하나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교회가 지어진 직후 당시 제후의 폴란드 출신 부인이 카톨
릭이라 성당을 지어줬는데 그 성당과 경쟁관계였고 그런 관계를 통해 지역 경제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재건을 위한 시민단체 모임은 독일 통일 1년 전인 1988년도에 결성되었는데 큰 조명을 받지 못
하다가, 1990년에는 통일이 되면서 통합의 물결 속에 관심이 커지고 시 차원으로 사안이 확장된
다. 1989년 11월 첫 공식발표가 있은 후 1990년 2월에 재건에 관한 구체적인 발표가 이루어진
다. 그 동안 지속되어왔던 연구들을 합하여 언론에 모델, 사진등과 함께 공개하였다. 당시 대변인
이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그로 인해 더 많은 조명을 받게 된다.



1989년까지는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상 조항이 전혀 없었으나, 90년대 초 사업차원에서 구체
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논의의 급선무는 복원 자체에 관한 합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의 사람들이 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잔해 사진들을 보며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님들과 교회 대표들은 프라우엔교회가 드레스덴의 유일한 개신교 교회라며
재건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34
당시 지지자들은 교회의 잔해들을 전쟁의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였는데, 폐허 상태로 남기기보다는
복원을 할 때 잔해를 이용하면 상징성이 더 커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후에 사람들이 복원된
건물에 박힌 검은 잔해를 보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전쟁과 과거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 목사님과 박사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YP4Peace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당연히 재정문제가 논의되었다. Citizen Action Group의 의지
는 교회 건축을 모두 기부금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으로 따지면) 도지사가 총 비용
의 80%를 도에서 부담을 하고, 20%만을 기부금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금 결과 독일 전
역에서 건축 비용의 3분의 2에 달하는 현재 금액으로 175억 유로가 모금되었다. 이는 교회가 50
년 넘게 비참하게 무너져 있었던 것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 남았고, 또 사람들이 그
만큼 교회 복원에 관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시민단체 멤버들의 공헌이 컸는데, 한 예로 단체의 대변인은 트럼펫 연주자였
다. 그는 앙상블을 3개나 하면서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전국을 돌면서 모금을 위한 공연을 1500
회나 하였다. 콘서트 자체로는 큰 액수가 모금되지는 않았지만,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큰 감동
을 받았고, 콘서트가 끝난 후에는 전보다 훨씬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



그 다음으로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드레스덴 은행의 노력이다. 은행원들은 기부금 편



                              35
지를 만들어 판매하여 돈을 모았고, 은행은 보유하고 있는 금, 은, 동 등을 기부하였다. 1~2년 안
에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시의회는 이를 강력히 밀어주었고, 드레스덴 시도 비용의 3분의 1
에 해당하는 공공자금 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공사는 어느 정도 비용을 모은 후 시작했지만 공사속도가 너무 빨라 예산이 부족하게 된 적도 있
었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회가 점점 형상을 갖추자 점차 프라우엔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
인 관심이 높아져 1993년부터는 주립교회, 드레스덴시, 자유작센도시에서도 복원에 참여하였다.
드레스덴 시의 주된 역할은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공공자금을 마련하는 것이고,
주립교회는 토지 재정비와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일어나서 설명하시는 부분]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오른쪽 사진 참고)이
공사 진행 정도이다. 건물 아래 부분이 지어진
후 위 부분의 공사를 진행하면서 예배를 시작
하였는데, 예배 기부금만 200만 유로 가량이
모금되었다.



현재 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와 작은 돔은 교회 재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이 우리도 돕겠다
고 하여 직접 제작하여 보내준 것이다. 우연찮게도 십자가를 주조한 사람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공군이었는데, 그 때 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공사는 2005년에 완료되었다. 1993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후 13년간 사고가 한 번도 없었고 관
심도 높았으며 예산도 부족하지 않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공사를 하면서 이를 경우는
독일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책임자들은 이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36
Holger Treutmann 목사님 말씀




‣ Holger Treutmann 목사님


프라우엔 교회 자체만 보면 유럽의 작은 점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왜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샀는
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분단과 냉전시기에 도시 자체가 경계도시를 상징하는 곳 중
의 하나였다. 폴란드 체코 등과 접경하여 서구와 동구가 부딪히고 대립되는 곳이었다. 50년 넘게
진행된 냉전시기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통일을 통해 이념과 갈들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러
차이가 발견되었는데, 교회 재건을 통해 양 체제의 이질성을 좁혀가고자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
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재건이 아니라 유럽의 통합과 세계의 평화를 상징한다. 정부차원의 갈등
이나 개인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갈등에서 파생되는 것은 적개심밖에 없다. 그 적개심을
치유하고 줄여가기 위한 길을 찾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그 결과가 재건 사업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교회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시는 모습        ‣ 교회 투어 중인 YP4Peace


목사님 Q: 한국에서도 그런 적개심,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분단된 현실에서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는 적개심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있는
         지 궁금하다.



                           37
YP4Peace: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이 점점 잊혀지고 분단이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독일에
      와서 보려는 것은 우리가 좀 더 분단에 대해 알고 독일은 어떻게 통일하고 통합해 갔
      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서이다. 들으면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구나 해서 기
      뻤다. 한국은 통일을 사회 이슈로 만들어가야 하는 수준인 것 같다.



박사님 : 분단시절 동·서독은 적어도 편지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힘들긴 했지만
     가능하기는 했다. 남·북한의 관계와 비교했을 때 독일이 더 상황아 나았고, 통일도 더
     쉬웠을 것 같다.




‣ 한국에서 준비해온 선물 증정           ‣ 감사한 마음을 담아 교회 헌금

목사님 : 최근 독일에서 여자 축구 월드컵이 있었는데, 미국과 북한의 경기가 드레스덴에서 있었
     다. 목사님과 몇몇분이 경기 후 콘서트를 마련하였다. 콘서트는 편안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고, 차도 마시며 우리가 준비한 글을 읽으며 서로에 대한 불편
     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그런 자리였다. 글을 보낸 후 미국팀 대표들은 참석하겠다고 답했
     고 실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결국 오지 않았다. 정말 아쉬웠다.

     내년 5월에 세계의 젊은 청년들을 초대하여 평화와 이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전세계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해소하며 화
     합하려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국이 멀긴 하지만 오면 좋겠다.




                                                  by 영현




                          38
한국에 돌아와서 프라우엔교회 트루먼 목사께 작은 선물과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감사하다며 메일을 보내주셨다.



Dear Yunghyun,

it was a great pleasure for me to have you here as interested
visitors in Frauenkirche Dresden. Thank you very much for all kindness
during your stay here with me and Dr. K=F6ckeritz.(?) I also want to
thank you very much for the gift that reached me from Korea with
the good wishes for us.

I hope we have the chance to meet again in the future.

God bless your work for peace an reconciliation.

Sincerely Yours

Holger

                                                       Holger Treutmann
                                       Pfarrer der Frauenkirche Dresden




                                  39
<쉬어가기>



100인+@
거리인터뷰 이야기




이곳은 베를린


2011년 8월 15일 날씨 맑음. 이 날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 단순
히 휴일로 생각하고 넘어가버릴 수 있는 날이었지만, 독일에서 보낼 815는 특별해야 했다. 독일로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는 독일, 베를린에서의 광복절을 어떻게 보낼지 수많은 고민과 토론을 했다.
그래서 결정된 815 마라톤과 거리인터뷰. 전 날 밤늦게까지 인터뷰 준비를 하고 새벽부터 부지런
히 일어나 마라톤과 인터뷰 준비를 했다.


오전에 마라톤을 마치고 숙소에서 노란 단체티로 갈아입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독일인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인터뷰에 응해주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래서 최대한 설문을 간단하고 재밌게 할 수 있도록 커다란 판에 O/X로
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고 색도 알록달록 눈에 띄게 만들었다. 그렇게 재미난 설문으로 다가온 사
람들에게 좀 더 세부적인 질문을 하기로 나름의 전략을 짜고 역할을 나눴다.




                           40
우리의 인터뷰 전략지는 분단의 상징에서 독일통일의 상징이 된, 늘 사람으로 붐비는 ‘브란덴부르
크 문’ 앞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는데 그곳엔 관광객이 굉장히 많이 온다
는 것이었다. 이러다 독일인보다 관광 온 외국인만 인터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막상 도착
하고 나서야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외국인인 주제에 (그들이 독일인인지 확인
하기 위해) 그들에게 “Where are you from?"을 반복해 많은 현지인들을 황당하게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어도 시원찮을 물음을...흐흐)
우선 O/X 인터뷰의 질문은 이렇게 4가지였다.



   <질문1>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Do you have any interest in the topics of
         "divided nation" and "reunification"?


   <질문2>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unification changed the German society positively?


   <질문3>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Germany is reunified "completely"?


   <질문4>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Do you think the unification of two Koreans is possible?




                                      41
우리와 동행해준 독일 유학생 ‘조선희’샘의 도움으로 영어를 못하는 독일인들을 위해 영어와 함께
독일어도 적어두었다. 실제로 영어에 서툰 10대나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의 설문을 받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대상은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고,
독일인과 비독일인으로 나누었다. 거기에 4가지 색깔의 스티커로
10대, 20~30대, 40~50대, 60대 이상으로 세대별 답변도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우려와 달리 사람들이 굉장히 밝게 우리의 설문에 응해주었다. 노
란 단체티와 화려한 머리띠로 시선을 끌고 색색 스티커로 재미를
유발하게 한 전략이 먹혔던 것 같다.


외국인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스티커를 고르고 고민해가며(재밌어
하며) 설문을 하는 모습에 우리는 흥이 나서 더 열심히 사람을 모으고 설명을 했다. 스티커 설문
자 중 독일인을 대상으로 깊이 있는 세부 인터뷰도 진행했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고 독
일 내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도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전 세계인들과 직접 부대끼며 소통한다는
것이 더욱 좋았다.




                             42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약 130명가량의 설문을 받았다.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
목표했던 100명의 설문을 훌쩍 넘었다. 사실 O/X 스티커 붙이기는 답변이 너무 편중되어 답변 자
체로 보면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베를린 거리설문 분석표>
                               1번 질문     2번 질문      3번 질문   4번 질문
                  10대           34         33        30      30
                  20~30대
                  20~30대        52         49        42      51
                  40~50대        32         26        28      29
                  60대 이상        14         14        14      14
                      합 계       132        122       114     124




   1번 질문.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1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6      14      30
              20~30       10      37      47
    O         40~50       8       22      30
             60 이상        8        5      13
             소계        42      78      120
               10대        2        1       3
              20~30       1        3       4
    X         40~50       0        1       1
             60 이상        0        1       1
             소계        3       6       9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32




                                               43
2번 질문.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2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7      16      33
       20~30        8      40      48
 O     40~50        7      19      26
      60 이상         7      6       13
      소계        39      81      120
        10대                         0
       20~30                        0
 X     40~50                        0
      60 이상                1        1
      소계        0       1       1
        10대                         0
       20~30               1        1
 ?     40~50                        0
      60 이상                         0
      소계        0       1           1
               합 계                122




                                        44
3번 질문.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3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6         2         8
          20~30         2         5         7
 O        40~50         3         2         5
          60 이상         1         3         4
          소계       12        12        24
           10대          14        7         21
          20~30         4         30        34
 X        40~50         10        12        22
          60 이상         6         4         10
          소계       34        53        87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14




                                                  45
4번 질문.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4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2        14       26
        20~30        9         37       46
 O      40~50        11        15       26
       60 이상         8         5        13
       소계       40        71        111
        10대          0         1          1
        20~30        1         3          4
 X      40~50        1         0          1
       60 이상         1         0          1
       소계       3         4         7
        10대          3         0          3
        20~30        0         1          1
 ?      40~50        2         0          2
       60 이상                              0
       소계       5         1               6
                합 계                     124




                                              46
YP4Peace_Final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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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4Peace_Final Report

  • 3. C a tr1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h pe . £ 독일의 통일과정 개괄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 동독시민혁명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슈타지 박물관,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 동서통합과 새로운 희망 : 프라우엔 교회 <쉬어가기> 길거리 100인 인터뷰 C a tr2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h pe . _ 과거사 인식과 성찰 £ 독일의 과거사 개괄 £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 £ 테러의 토포그래피, 유대인 학살기념공원 C a tr3 8.15 광복절 기념행사 h pe . £ 영상 제작 의미 £ 8.15 기념 마라톤 스케치 깨알같은.. Ifr ain nom t . o £ <독일 둘러보기> "여기는 꼭 가보세요~!!" £ 맥주맛 쫌 아는 재현군이 소개하는 독일의 맥주 £ 독일에서 식비 아끼는 법 £ 값싸고 질좋은 숙소를 소개합니다 Y 4 e c 마무리 한마디 PPae
  • 4. C a tr1 h pe . 독일의 분단과 통일과정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4
  • 5. £ 독일의 통일과정(개괄) 1. 동독 공산정권의 자체 붕괴 ○ 1989년 5월 2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철거한 것을 계기로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이 시작. ○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 으로 촉구하고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비밀회합에서 소련군의 동독시위 불개입 방침을 천명한데 이어 주 동독 소련대사가 시위의 유혈진압은 안된다고 경고. ○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성당에서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서독 TV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 10월 6일에는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참가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전국 규모로 확산되고 1989년 중 46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 ○ 동독 공산잔당들과 개혁세력들은 동독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원탁회의를 구성하여 국정을 운영 하는 한편,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서독 기민당의 제휴정당인 「독일연맹」이 승리. 2. 동독주민의 서독편입 결정 ○ 4월 12일 로타 드메지어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4월 19일 드메지어 총리가 서독 기본법 23조 (기본법 적용지역 규정)에 의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함. ○ 통일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5월 18일 사회경제화폐통합조약을 체결되고 8월 30일 통일 조약 체결, 9월 20일 동ㆍ서독 의회의 통일조약 비준, 10월 2일 동독의회의 “독일민주공화국” 동독) 소멸 의결 등을 거처 10월 3일 통일을 달성함. 3.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확보 ○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1월 28일 서독정부는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한 후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약속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외교에 착수했음. ○ 소련에 대해서는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대폭축소(66만 5천→37만), 대 규모 경제원조(철수비 지원 90억 달러, 매년 34억 달러의 소련군 주둔비용 부담) 등을 약속하 는 한편, 미국과 협조하여 소련을 압박하면서 2+4 회담을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동의 를 확보함. 4. 체제통합 과정 ○ 서독체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되 동독인들의 적응을 위해 일부 법규정의 적용은 1~3년간 유 예하고 동독의 행정체제를 서독 체제로 개편함. ○ 화폐통합, 동독 국유재산의 매각(2,564억 마르크 적자), 서독 사회보장 제도의 동독으로의 확 산, 반 법치국가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 공산치하에서의 피박해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경제 ㆍ사회 통합을 추진했음. 5
  • 6. 5. 독일통일의 성공 배경 ○ 직접적 요인 –고르바초프의 개혁ㆍ개방 정책, 소련의 동구포기, 동독의 개혁 촉구. –동구권의 개혁 및 민주화 혁명 열풍. –공산정권에 대한 동독주민의 염증 확산. –동독의 경제 파탄. –동독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 결여. –미국의 적극적 지원. ○ 간접적 요인 –서독이 동독주민의 동경대상이 되었다는 점. –원칙을 고수한 서독정부의 정책 –동독주민의 「삶의 질」개선에 중점을 두었던 서독의 대동독 정책. –동독주민의 서독 TV 시청. –주변국의 신뢰 확보. £ 통일 이후 동․서 통합 과정에서 독일 사회의 주요쟁점 1. 정치경제 ○ 통일 방식 -정치적 의미에서 통일은 ① 한 국가가 어느 한쪽의 헌법을 받아드리거나, ②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 서독 기본법 23조 ①의 방식, 서독 기본법 제146조는 ②의 방식이다. -제23조에 따른 통일은 ‘통일을 위한 빠른 길이나 흡수통일의 길’ 제146조에 따른 통일은 느린 길이지만 동서독이 대등한 관계에서 새롭게 출범하는 국가의 정체성을 함께 만들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 ○ 화폐통합 -동독시민들을 위한 통일열기 조장, 동독주민의 이주 억제, 동독 정부의 요구 등의 이유들로 동서독 화폐 1:1 교환. 동독 경제가 순식간에 300% 평가 절상된 화폐가치로 세계시장경쟁에 내던져지면서 동독 경제 순식간에 붕괴. ○ 신탁청에 의한 국유재산 매각 -「인민 소유 재산의 사영화 및 재조직에 관한 법률」 을 바탕로 신탁청이 민영화 추진 기관 화 됨. 재정이 고갈된 동독정부의 재정마련 방안. -1994년 까지 1만5000개 이상 기업, 4만5600건 이상, 6만 7000헥타르의 토지와 산림이 매 각됨. 대부분 서독인들이 구입 6
  • 7. ○ 재산권 방환청구 : 반환이 배상에 우선한다. -서독인들이 과거 동독지역에 갖고 있다 몰수당한 재산에 대한 권리회복을 인정한 재산권 반 환 청구권은 통일독일 정책의 실책으로 꼽힘. -220만권의 소송이 진행됨. 동독 총 면적보다 많은 면적이 소송에 걸림. 2. 사회문화 ○ 동독엘리트 숙청 -‘인권 및 법치국가의 기본원리’를 훼손시킨 경우 비정상적인 해고가 가능하도록 규정 슈타지 등 동독정치체제에 물든 사람들 숙정가능. 인적 재편의 과정에서 동독 엘리트들의 심 각한 반발. ○ 과거청산 -슈타지는 동독 질서를 유지하는 기간 조직으로 민중들의 원성을 사게 되면서 체제의 붕괴를 가져옴. 슈타지 희생자들이 그동안의 억압과정을 확인하고 복권과 보상을 요구함. -그러나 동독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감시자가 되고 또 감시의 대상이 되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복잡성이 존재. ○ 동서독 주민간의 이질감 -차이의 핵심은 서독인들의 개인주의적 사고방식과 동독인들의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의 차이. 이러한 사고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들부터 가치를 둘러싼 지식인에 이르기 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남. 7
  • 8. £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식 (8.13, Berlin) ‣ 왼쪽 위, 기념식중 장벽관련 증인들의 증언을 듣는 행사 ‣ 왼쪽 아래, 분단과 관련한 퍼포먼스 1. 베를린장벽의 역사 <설치> - 독일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베를린 장벽 구축은 1961년 8월 12일과 13일 사이 의 새벽에 발생 - 사회주의 통일당 지도층이 동베를린과 동독으로부터 서베를린을 차단하기 위해 장벽 구축 지시 -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오려다 숨진 이들은 1961년 8월 24일 구엔테 리트핀을 시작으로 1989년 2월 6일 크리스 구에프로이까지 적어도 136명으로 추정 (정확한 수는 논란중, 희생 자 가족단체들은 700명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상황) <철거> 베를린 장벽 구축으로부터 28년이 지난 1989년 11월 평화혁명으로 장벽 철거. 2. 관련기사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 베를린 장벽 - 연합뉴스 박창욱 특파원 2011-08-13 23:16 13일(현지시간) 정오 독일 수도 베를린시 도심이 일순간 정지했다. 버스, 기차 등 대중교통 시스템은 1분간 운행을 멈췄고, 거리의 시민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 의 시간을 가졌다. 때맞춰 곳곳에서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평소보다 명징하게 들렸다. 자정부터 베를린시 `화해의 교회'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발각돼 숨진 이들 중 136명의 전 기가 낭독됐다. 베를린시는 또 야외 영화제를 열고 베를린 장벽을 따라 소재한 역사적 장소를 찾 8
  • 9. 는 관람객들을 안내했다. 베르나우어 거리에서 열린 베를린 장벽 건설 5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베 를린 장벽은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3주 휴가를 마치고 첫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메르켈 총리는 "장벽 건설이라는 부당성은 오늘의 우리에게 국내외에서 자 유, 민주주의, 인권 등에 대한 지지를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목사의 딸로 서독에서 태어난 메르켈 총리는 가족이 동독으로 이사하면서 어린 시절을 동독에서 보냈다. 그녀는 "그때 나는 7살이었는 데 장벽 건설이 우리 가족에 가한 테러를 기억한다. (장벽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사촌, 조부모와 만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1989년 이 끔찍한 장벽의 붕괴에 우리 독일인들 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더욱더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이민자들이 사회 통합할 수 있도록 돕고 시민들이 자신의 잠재력 에 완전히 이를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독일 내 자유를 더 신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50년 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것은 세계가 자유와 민주주 의를 지지한다는 것을 회고해주는 상징물"이라며 "베를린 장벽으로 인한 인권침해와 죽음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동독 정권은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61년 8월 전장 155㎞의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앞서 동독 주민 1천900만명 중 2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에 찬성표를 던 졌고, 매일 3천명이 매일 서독으로 넘어갔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9일 갑작스런 붕괴를 맞 을 때까지 28년간 동서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장벽 일부가 남아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 며, 베를린시는 역사적인 보존을 위해 장벽 해체 20년 만에 복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50주년 냉전 최전선서 철거 뒤엔 ‘양극화 상징’ -한겨레 정의길 기자 20110814 20:32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지 13일로 50주년을 맞았다. 베를린 장벽은 1989년 붕괴 되며 독일 통일과 사회주의권 붕괴의 봇물이 됐으나, 그 전 28년 동안 동서냉전의 최전선으로 존 재했다. 베를린시는 이날 장벽이 세워졌던 베르나우어가에서 기념식 등 여러 행사를 열었다. 클라우스 보 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은 이날을 최근 역사에서 가장 슬픈 날로 기억하고 있다”며 “장벽 은 역사가 됐으나, 우리는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장벽은 이를 만든 사람들의 공포의 표현이었다” 며 “이 장벽이 상징하던 당시의 세계상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 유는 정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장벽도 결국 자유의 의지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 했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13일 동독 당국에 의해 철조망으로 처음 만들어진 뒤 나중에 160㎞ 장 9
  • 10. 벽으로 진화됐다. 탈출자들을 막으려는 300개의 감시탑도 세워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지뢰도 심어 졌다. 동독 당국은 장벽을 ‘반파시스트방어 성벽’이라고 부르며, 파시스트 서방을 막기 위한 장벽 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장벽은 이제 철거돼 일부 지역에서 역사적 기념물로만 남아있으나, 부유한 서쪽과 가난한 동쪽을 가르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기도 하다고 <비비시>(BBC)는 전했다. 동독 교사 출신으로 여전 히 동베를린에 살고 있는 브리기타 하인리히는 통일 이후에도 “내가 지금까지 사귄 서독 사람들 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댈 수 없다. 정말로 그들과 사귈 수 없다”며 통일 이후 상황에 아직도 적응 할 수 없음을 고백했다. 3. 느낀 점 by 이준호 ‘장벽 설치를 기념한다고?’ 처음 베를린 장벽 50주년 기념행사 일정을 계획할 때 이 행사에 대해 선뜻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장벽을 철거한 것이 아닌 설치한 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기념 식에 직접 참여했을 때야 비로소 이 행사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역사의 아픔을 기 억함으로써 정치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책임의식을 고취시켜 이와 같은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이 행사를 기획한 인사들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 아니었을까 싶다. 15일 방문 예정인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의 설립 취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불프 대통령, 보베라이트 시장 등 각종 정치 인사들의 기념인사와 함께 행 사에 참여한 독일인들은 모두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증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 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온 몸으로 분단의 아픔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 준 바로 이 장면! 한 편의 오페라를 보는 듯 했던 이 이벤트는 남한의 한 여성 청년의 멘트로 마무리 되었다.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독일 시민들이 겪었던 분단의 아픔이 아직 우리나라(Korea)에 남아 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소중한 첫째 날, 첫 행사였다. by 준호 10
  • 11. £ 라이프치히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시민들의 통일운동의 기억저장소' (8.18, Leipzig) 라이프치히에서의 아침, 우리는 숙소에서 나와 라이프치히에서 제일 번화한 지역을 향했다. 번역을 맡아주기로 한 최선화씨와의 만남, 그리고 구 동독지역의 통일 시민운동의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는 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체어맨과의 인터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다세대 주택의 한 건물로 들어선 우리는 나선형의 폭 좁은 나무 계단을 총총히 밟고 2층, 3층을 올랐다. 곧 시민운동기록보관소의 작은 간판이 걸린 흰색 현관문이 보였다. 초인종을 누르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곧 환한 얼굴의 중년 여성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은 라이프치히 시민운동 기록보관소. 체어맨인 Uwe Schwabe 씨와의 만남, 짧은 소개 후에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Schwabe 씨: 이 건물이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시민운동기록보관소는 정치적, 문화적 통일이 이 루어지고 난 199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동독 시절에는 구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여기서 신문, 기사들을 썼지요. 공산주의 때 이런 활동들은 금지되었기에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웠고, 그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자료들이 여기에 보관되었습니다. 다른 곳에도 기록 보관소가 있지만 그 시기의 자 료는 이곳에만 있습니다. 시민운동을 한 사람들이 다른 곳에 자료를 넘기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곳 에만 자료를 맡겼습니다. 당시 동독정부는 자료를 다 없애버리는 상황이었기에 다른 곳에는 보관 을 할 수 없었지요. 이곳은 정치적인 분위기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자료는 무엇이던지 확인이 가 능하고 최근 5~8년 간 자료만이 아니라 DDR시절에 유대인과 외국인에 관련한 전시회도 하고 있 습니다. 1989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통일과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학생들을 상대 로 한 방문교육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 시민운동기록보관소 체어맨, Uwe Schwabe 씨 11
  • 12. Q. 기록운동보관소가 언제 생겼는지요? A.(Schwabe씨) 1990년도 가을에 기획하여 1991년 5월에 생겼습니다. ‣ 인터뷰중인 독통참가자들(오른쪽에서 2번째가 통 역해주신 최선화씨) Q. 이곳은 통일 이후에 설립되었는데요. 통일 이전에 동독의 활동과 시민운동 내용을 보관하는 이유와 기록을 보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세요. A. 공산주의 서기장이 어떻게 살았는지, 공산주의는 어떻게 작용했는지, 어떻게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었는지, 데모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지금의 정치에도 도움이 되고 시민들의 운 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이곳에 대한 책도 쓰고, 역사가들도 많이 와서 동독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는지를 연구하고 있지요. 영국, 오스트리아 등에서 도 연구자들이 와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연구합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이 곳의 자료를 제공합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도 그 시절(구 동독)에는 찍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지요. 이것은 1989년에 일어난 800명이 모인 시민운동 사진입니다. 12명이 저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 사람 들은 다 감옥에 갔지요. 500미터를 걸어가는데 사람들은 다 처벌받고 끌려갔습니다. ‣ 1989년 1월 15일 평화시위 12
  • 13. Q. 기록보관소 중에서 라이프치히에서 유독 자료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A. 막데부르크, 드레스덴, 폴란드 인접 도시, 베를린, 핸더스부르크에도 기록보관소가 있습니다. 주요 주마다 각자 자료를 가지고 있는데 각 지역의 하이라이트 자료는 해당 지역에서 보관하 고 있지요. 기록보관소에 대해서 정부가 하는 것은 없었고, 각 주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한 곳 으로 통합할 수 없어서 시민들이 각 주마다 여기 저기 만들었지요.(*독일은 연방제 국가라서 중앙정부보다 주정부의 역할이 크다) 동독지역의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Neues Forum(노이스 포럼)에서 시민들끼 리 논의했습니다. 평화시위 후 3개의 단체라 결성됐는데, 민주주의 하려는 사람들, 노이스포럼, 평화와 인권 관련 단체 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3개의 그룹이 90년도에 하나로 합쳐졌고 하 나의 당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데 이것이 녹색당입니다. 동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서독에서는 방송이 되고 있었고, 동독에서도 몰래 티비를 설치 해서 서독의 방송들을 같이 봤고 그런 정보들이 시민운동에 힘이 되었습니다. 동독 내에서는 라이프치히, 베를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지만, 서독 방송을 몰래 보고 정보 를 얻어서 동독 내의 다른 지역에서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동독 사람들이 몰래 서독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서독에 넘어간 사람들이 동독에 대한 자로들을 작성했습니다. 처음 공산당을 반대한 사람들이 운동한 것은 통일을 위해 했다기보다 자기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지요. Q. 시민운동 기록보관소인데 구 동독시절 위주의 자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도 시민들이 시위를 하 거나 할 텐데 그것도 이곳에서 보관을 하시는지요? A. 이제는 정부에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공개 로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곳은 역사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 동독에서 시위에 사용되었던 인쇄물 13
  • 14. Q. 동독의 시위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는데 라이프치히는 동독 내 어떤 위치였나요? A. 박람회가 1년에 2회 봄, 가을에 일주일동안 열려서 세계적으로 오픈된 곳이었습니다. 동독인 들도 박람회에 참가할 수 있었지요. 이곳에선 공업에 관한 행사가 많아 세계 여러 나라와 도 시에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좋은 것들이 있는지 알 수 있었지요. 특히 우리가 지지지 못한 것 들을요. 라이프치히에는 특별히 공업품이 많아서 다른 도시에는 무엇이 있는지 볼 기회가 많 았거든요. 또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에너지를 많이 생산했어요. 공업 화학 공장들이 아주 많거든 요.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지요. 채굴을 너무 많이 해야 해서 힘든 노동의 연 속이었고 삶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DDR(구 동독정부)의 반 대 세력과 국민들이 합세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위할 때 나눠준 종이에 모임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어요. 좀 전에 사진에서 본 12명이 만 들어서 나눠주고 그들은 감옥에 갔지요. 남은 한 명이 설명하고 시민운동을 주도했고요. 종이 를 받은 시민들이 그 모임을 해냈습니다. 슈타지에서 발견해서 가지고 온 자료에는 12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서명운동을 서독에서 했다 고 합니다. 자매도시인 하노버에는 1월 15일 동독이 시위했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신문에서는 사람들이 유치하게 방해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시위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전단지 종이와 현수막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이동하여 체어맨은 우리를 기록보관실로 안내했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앵글로 쌓아 올린 기록 보관 책장들, 그 사이에 가득 쌓인 기록상자들이 인상 깊었다. 그 상자들에 가까이 다가가니 상자마다 날짜와 장소가 꼼꼼히 타이핑된 라벨지가 붙어 있었다. ‣ 기록보관소(1) ‣ 기록보관소(2) Schwabe 씨: 베른린 벽이 무너졌을 때, 구동독의 정치인들은 동독제도가 좋다는 내용으로 새로운 당을 세웠지요. 그 당의 이름에 똥이라는 글자를 써서 반대 운동을 한 깃발이 있지요.(*체어맨은 자랑스럽게 그 현수막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22년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현수막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14
  • 15. ‣ 1989년 1월 시위에 등장한 현수막과 피켓 시민들이 Neues Forum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고 그 편지들은 파일로 보관되어 있어요. 이 포럼은 동독에서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1998년 도시 폐허에 대한 사진전도 했지요. 슈타지 자료도 조금 보관하고 있습니다. 슈타지는 라이프치히에 어떤 단체가 있는지 조사하여 이 를 기록했어요. 종이 전단지 배부를 한 시위자 2명 중 한 명에 대한 슈타지 기록이 파일 한권으 로 작성되었습니다. 통일 후에 그 시위자 본인이 이곳 기록보관소에 기증했지요. 이 분은 1989년 5월에 서독 쾰른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동독을 떠났습니다. ‣ 슈타지가 작성한 기록들. Q. 이 곳의 운영비는? A. 작센주에서 50000유로, 라이프치히에서 10000유로(이는 집세로 사용)를 지원합니다. 기획서 를 작성하여 여러 단체에서 프로젝트를 받지요. 매년 프로젝트를 신청하고 있으며, 국가기관이 아니므로 후원이나 프로젝트비가 고정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5
  • 16. 22년 전 라이프치히 거리에 휘날렸을 현수막을 보여주며, 그 때의 추억에 잠겨 자랑스럽게 설명해주던 Schwabe 씨의 즐거운 표정이 생생하다. 더 나은 삶 그리고 자유와 개방된 삶을 원했던 시민들의 힘. 그것은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에 꼭 닮아있었다. 세계 박람회의 개최로 세계에 열려있던 개방도시 라이프치히. 이곳의 시민들은 다양한 국가와 도시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민들은 개방에 대한 싹을 튀우고 있었다. ‣ 기념품 전달 ‣ YP4Peace 방명록 작성 Schwabe 씨에게 한국에서 미리 포장해 간 선물(해태모양이 그려진 나전칠기 명함집)을 전달하고 단체사진을 찍으면서 라이프치히 기록보관소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참! 선물을 전달하면서 벌 어진 작은 에피소드, 해태모양을 설명하면서 한국의 전통문양 중 “악마”라고 소개를 한 것.. 급안 색이 나빠진 Schwabe 씨...ㅋ 급히 정정해서 마귀를 쫓아주고 복을 불러주는 동물이라고 다시 수 정했다는 후문...^^ by 지영 16
  • 17. £ 라이프치히 슈타지 박물관 (8.18, Leipzig) 1. 슈타지 박물관 내력1) 과거 라이프치히 주변 구역의 슈타지 비상통제본 부였던 슈타지 박물관은 라이프치히에서 동쪽으 로 30km 정도 떨어진 마셰른(Machern)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슈타지가 활동할 당시에 이 건물은 라이프치히의 생활용수 공급과 상하수도 관리를 담당했던 VEB라는 국영기업이 소유한 레 크레이션 시설로 위장되었다. 건물의 핵심은 1968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어진 벙커이다. 동 독 사회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슈타지 본부의 ‘기 동성’이 요구되면서 120명의 직원과 2명의 KGB (소비에트 비밀요원) 연락담당요원이 라이프치히 ‘룬데 에케(Runde Ecke)' 건물에서 마셰른으로 이동했다. 비상통제본부는 비밀리에 지어져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서도 슈타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마셰른의 벙커는 구(District) 단위의 슈타지 비상통제본부 중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있는 곳이 다. 이 특화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시민위원회 문서들은 슈타지의 군사활동과 ‘긴장과 기동성’ 케이스에서의 기능을 알려주고 있다. 전체 대지면적은 5.2헥타르이고 현재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모든 내부장식을 포함한 건물과 설치물들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가이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특히 어떻게 공급 시스템이 작동했는지, 어떻게 뉴스들이 동독에서 생산되었는지, 핵무기 공격에 대비 해 슈타지가 작성한 생존전략 등을 알려준다. 전시회는 라이프치히 구역 내의 ‘이동’계획과 이 계 획들에 비상통제본부가 개입한 사실을 보여준다. 2. 슈타지 박물관 가이드 현재 슈타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최초 1906년 유대인 보험회사(라이프찌히 보험회사)에서 세운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았으니 꽤 운이 좋았다고 하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이 소 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1945년까지 미국인이 소유하 고 관리했다. 소련은 이 건물을 동독 내 중앙본부로 1950 년까지 사용했고 1950년에 슈타지가 창설된 이후 1989년 까지 슈타지가 사용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슈타지와 경 찰이 함께 상주하게 되면서 이 건물 옆에 새로 건물을 지 ‣ 슈타지 박물관 설명듣는 YP4peace 었는데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53&L=1 17
  • 18. 슈타지는 동독의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를 이끌던 SED(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사회 주의통일당)2)가 관리했다. 베를린에 슈타지 본부가 있었으며 라이프치히 지부 역시 베를린의 관리 아래에 있었다. 1989년에 슈타지 요원은 총 9만1천명으로 창설 당시 6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로 조직이 커 진 셈이다. 특히 라이프치히에는 2401명의 요원과 1만 명의 보조요원이 활동했다. 당시 구동독의 인구가 1,600만 명, 라이프치히의 인구가 53만 명이었음을 볼 때 상당한 수준의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슈타지의 상징은 방패 위에 총이 놓인 그림이다. 총은 소련이 개발한 칼라슈니코프이다. 총의 상징처럼 슈타 지 요원들은 유사시 군인처럼 무력을 사용할 수 있었 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 슈타지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 시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시절이었고 동독지역보다는 서유럽 쪽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별다른 지침 등이 정 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슈타지에 일하는 요원들은 군인과 비슷하여 자유의사로 그만둘 수 없었다. 정년까지 일하든지 군 대로 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당시 동독의 학생들은 7학년이 되면 슈타지 요원으로 활동할지 결 정할 수 있었는데 학생 본인과 부모, 선생님과 논의한 뒤 부모가 동의하고 서류에 서명하면 나중 에 슈타지에 배치되어 활동했다. 이 때 슈타지에서는 생계보조, 지위보장 등의 당근을 던지며 지 원자를 모집했다. 2) 1946년 10월에 독일의 소련 점령지구로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합병하여 성립했다. 그리고, 서쪽 점령지 구의 독일 사회민주당은, 그대로 존속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찬반를 결정하는 투표를 했다. 그러나, 동베를린에서는 소련군에 의해서 투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실제 투표를 할 수 있던 것은 서베 를린의 당원뿐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과의 통일에 찬성한 표는 불과 12%였기 때문에 통일사회당 성립 후에도 일정 기간 사회민주당이 존속했다.(서베를린의 사회민주당이 동 베를린에서도 활동이 허용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베를린 에는 서베를린 통일사회당도 존재했다) 통합 후, 최초에는 지도부의 반씩이 구 공산당과 구 사민당이었지만, 구 독일 사회민주당계의 당원은 서서히 제명되어 실체는 공산당 이었다. 단지 1946년 당시 존재하고 있던 정당으로서는 독일 최고인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국에 강력 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하는데 있어서의 이용가치는 매우 높았다고 여겨진 다.(통합 당시, 공산당원이 60만명에 비해, 사회민주당은 68만명이었다. 사회민주당 쪽이 우세하였다.) 1949년 소련 점령지구가 독일 민주 공화국이 되면서, 국가를 지도하는 당으로서 사실상의 일당 독재체제를 시행해, 동독을 지배하였다. 1989년의 민주화와 통일로 정권을 잃어, 통일사회당/민주사회당(SED/PDS)을 거쳐 민주사회당(PDS)으로 개 명했다. 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 등과 함께 연합해 공산주의 계열의 좌파당으로 통합되어 연방 의회 제 4당으로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특히 구 동독에서는 뿌리 깊은 지지를 받고 있 는 것 외에 구 서독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고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8F%85%EC%9D%BC_%ED%86%B5%EC%9D%BC%EC%82 %AC%ED%9A%8C%EB%8B%B9 18
  • 19. 슈타지 조직 내에는 여러 하위부서가 있었는데 각각 도청, 도촬, 우편물 검색, 환경단체나 교회 목사 감시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우편물 검색을 하며 귀중품을 발견할 경우 몰래 갈취하기 도 했다. 사실 이러한 우편물 내 금품 갈취가 있었던 데에는 기계의 도움이 컸다. 편지봉투 뜯은 흔적을 없애는 기계와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가 발명됨에 따라 우편물을 감시하는 효율이 급격히 늘었다. 매일 2,000여 개의 편지를 검사했으며 특히 서방 쪽으로 가는 편지는 영원히 보 내지지 않았다. 시민들 역시 꾀가 늘어 일단 동독 주소로 편지를 발송한 뒤 그곳에서 다시 목적지 로 편지를 발송하는 등 여러 대응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 편지봉투 흔적 없이 뜨는 기계. ‣ 편지봉투를 다시 붙이는 기계. 슈타지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체제를 위협할 만한 요소를 세세하게 감시했다. 이를 위해 첨단 감시물품이 발달했다. 소련의 스파이요원이 사용하는 장신구 혹은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등을 들여오고 서독에서 도청장치를 사와 동독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기계를 활용하는 방법 외에 도 개의 후각을 활용하여 냄새를 이용해 요주의 인물을 추적했다. 이를 위해 경찰서에서 ‘의심스 러운’ 개인을 미리 소환한 뒤 옷의 조각이라든지 머리카락 등 냄새를 채취해 보관한다. 이를 개에 게 기억하게 한 뒤 차후에 감시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다행히(?) 법정에서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증거라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주목하는 인물과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혀 당사자를 정신 적으로 힘들게 만들곤 했다. 이런 상황을 조장하여 평정심을 잃게 한 뒤 경찰서에 불러 조사를 하 면 슈타지에 유리한 결과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심지가 굳은 사람이 있어 서 주위 사람들에 대한 회유나 협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제2, 제3의 대책이 있어서 잠을 못 자게 한다든지, 외부와 통하는 모든 연락을 끊어버린다든지 하는 방법을 써서 어 떻게든 괴롭게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일단 혐의가 있어 갇힌 사람들을 절대 물리적인 고문을 가 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 단추에 부착하는 카메라. ‣ 감시를 위해 냄새를 채취해 놓음. 19
  • 20. ‣ 슈타지 분장에 쓰인 도구. ‣ 두 번째 단추에 녹음기가 연결되어있음. 1989년, 라이프치히에서 평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 던 일부 시민이 슈타지 건물 안으로 진입하여 자료를 확보했다. 30여 명 중 1명은 이제 시민이 슈타지를 통 제할 수 있다며 발코니로 올라가 마이크를 들고 도시 곳곳에 방송을 하기도 했다. 당시 건물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미 기울어진 분위기에 눌려 별 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이 30여 명은 슈타지가 보유하던 자료를 확보했다. 이 때 분노 에 휩싸인 일부 시민은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기 록된 자료에 혐오감을 느껴 파쇄기를 설치하고 자료를 없애기도 했다. 1992년 이후에 슈타지가 갖고 있던 문서에 대한 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령은 첫째, 누구나 이 문 서를 볼 권리가 있다. 둘째, 그 당시 정치범들의 복권에 관한 내용(정치범들에게 부당했다는 확인 서), 셋째,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물질적 보상 등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 당시 감옥에 갔던 사람 들에게 확인서를 줬다. 과거 구동독시절 감옥에서 나오면 석방된 카드를 받는데 그것은 일종의 낙 인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동독시절 공적기구에 근무한 사람들 경력을 전부 조사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는데, 현 공직선거에서 이 검증을 전제로 했다. 만약 슈타지에 부역한 것이 드러나면 그 지위를 박탈했다. 슈타지 밀정을 했던 기록이 발견되면 현직 선생을 해직시키는 방식이다. 슈 타지에서 시민들은 감시한 사람의 이름은 대부분 가명이었는데 실명을 추적해서 밝혀냈을 경우 동일한 방식으로 해고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들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사실 통일 직후에는 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 결정됐다. 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 자가 과연 ‘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 에서는 피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 리기도 한다. 구동독에서는 1987년까지 사형제가 존속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슈타지 내에서 총 64 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었다. 사형선고의 사유는 1) 동독에서 서방의 스파이 노릇을 하고 20
  • 21. 탈출하려다 발각, 2) 어린이 살해 등 사상적, 정치적인 이유가 주를 이뤘다. 잘 알려진 단두대(기 요틴)도 있었는데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1968년까지만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뒤에서 머리를 총으 로 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건물 내에는 사형당한 이들의 유골, 재를 모아 둔 장소가 있다. 당시 사형당한 이들의 가족에게는 사망사실만 통보될 뿐 사망의 원인이나 이유 등이 일체 알려지지 않 았다. 3. 관련자료 “처벌보다 화해”… 동독 슈타지 비밀문서 공개제한 250만명 감시기록 보관… ‘피해자’ 확인돼야 열람 “처벌보다 화해와 통합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7일 기자가 방문한 독일 연방 슈타지(동독의 국가공안국) 문서관리청의 요아힘 푀르스터 청장은 “문서 공개는 피해자가 요구할 때와 공익성이 인정될 때만 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슈타지는 동독의 비밀첩보기관으로 나치보다 더 지독한 1800만 동독 주민의 감시망이었다. 푀르 스터 청장에 따르면 슈타지엔 공식 직원 9만5000명과 ‘민간인 끄나풀’ 18만9000명이 있었다. 슈 타지 문서는 약 30만 명에 이르는 정보원이 동독 시절 내내 수집한 국민 감시기록인 셈이다. 통일 당시 동독 주민이 가장 먼저 탈취하고 보존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촉발한 동독 라이프치히 시의 ‘월요 평화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이름트라우트 홀리 처 여사(67·여)는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라이프치히의 슈타지 건물을 보여주며 “당시 시위대가 감시문서 확보를 위해 가장 먼저 점령했던 건물이 바로 이곳”이라고 설명했다. 슈타지 문서관리청이 보관 중인 기록물은 인쇄 문서만 옆으로 늘어놓으면 114km에 이르는 엄청 난 분량이다. 사진 140만 장, 녹음파일 3만1000개, 필름과 비디오 2705개도 함께 보관돼 있다. 전체 250만 명에 대한 감시기록물로 보관 선반만 1만5500개다. 슈타지 문서 공개를 둘러싸고 통일 직후엔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전면적인 공개는 되레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갈등만 일으키고 사회 통합에 역행한다는 판단 아래 ‘제한 공개’로 최종 결정됐다. 문서 공개 때 가장 큰 문제는 요청하는 문서가 존재하는지를 찾는 일과 문서 공개 요청자가 과연 ‘피해자’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 이 사건의 가해자가 다른 사건에서는 피해 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서 공개 요청부터 실제 공개까지 무려 2년이 걸리기도 한다 고 푀르스터 청장은 덧붙였다. 통일 독일 정부는 또 사회 통합을 위해 통일 직전 서독에만 슈타지 정보원이 4만5000명 있는 것 으로 파악했지만 통일 이후 적발된 간첩행위 3000여 건 중 82명만 기소하고 실제 처벌은 23명만 했다. 베를린·브란덴부르크·라이프치히=하종대 기자 orionha@donga.com 출처 : http://news.donga.com/Inter/3/02/20100923/31363500/1 21
  • 22. £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 홀리처 여사 인터뷰 (8.18, Leipzig) 1. 라이프치히 시민위원회3) 시민위원회는 평화혁명 중 설립되어 현재 룬데 에케 기념박물관과 슈타지박물관을 관리하고 있다. 시민위원회의 주요 목표는 사회주의 독재시절의 기억을 보존하고 정치교육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 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뿐만 아니라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시민위원회는 과거사 재평가와 공공의 의견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는 슈 타지와 그 후신의 실제, 구조, 관계 등의 개인적, 정치적, 법적, 역사학술적 재평가를 알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룬데 에케 기념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장하고 있는 내용에 영향을 받고 흥미를 느끼는 장소가 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열린 대화의 장으로 발전해왔다. 협회는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희생 자에게 조언하는 역할과 함께 학자, 학생, 기자, 영화제작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요청하는 연구자 료를 제공하며 지원하고 있다. 2. 인터뷰이 : 트라우트 홀리처 여사 나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이곳 슈 타지 박물관에서 20년 간 일했다. 슈타지 박물관은 사립단체로서 독립재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재정은 빠듯하지만 시민운동의 상징 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이 원활하게 운영되었으면 바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거쳐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동독지역에서 첫 시위가 일어난 곳은 1953년의 라이프치히였다. 이후 각지로 번져 베를린에서는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났다. 처음에는 경찰이 시위를 진압했으나 이후 소련군이 개입하여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시위 이후 슈타지가 주모자를 색출하는 작업을 맡았고 이때를 계기로 슈타지의 규모가 증가하게 되었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이후 동독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항의하는 사람 들은 총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 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었는데 가방 등 소지품에 부착하거나 지니고 다녔다. 학생 중 일부는 농기구 마크를 들켜 체벌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자 동독 당국 역시 집요해졌다. 시위정보를 캐내기 위해 핀셋으로 쓰레기통을 뒤지며 우편물이나 종이를 일일이 검사하기도 했다 3) http://www.runde-ecke-leipzig.de/index.php?id=202&L=1 22
  • 23. ‣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총 과 칼 대신 비폭력과 평화를 상징하는 농기구를 중심으로 한 마크를 만들어 소지품에 부착하거나 지니고 다님. 1985년 여름, 헝가리를 통해 서독 지방으로 탈출을 시도한 움직임이 있었다. 시민들이 직접 행동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위를 하며 동독을 나 가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청원했다. 그러나 어떤 정부기관도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고 청원서에 서 명한 사람들은 모두 국가에 의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곧바로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세계 여러 국가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개최 중이어서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체포하거나 구속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9년 5월, 선거가 치러졌다. 그러나 투표하지 않으면 집에 찾아와 압력을 넣거나 협박하는 등 부정선거의 양상을 띠자 시민들은 개표장에 몰려가 항의했고 두려움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은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1989년 6월에서 7월, 한 환경단체에서 항의데모를 준비했다.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인쇄할 필요 가 있었는데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지방에 가서 종이를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교회에서 많이 도 와주었다. 그러나 준비하던 중 83명이 잡혀갔다. 여러 가지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와중 중국의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아 동독 시민들의 의식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당시 동독 정부는 젊은이들이 기타를 들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석하는 것조차 경계했다. 노래의 멜 로디와 가사를 통해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 89년도 시위에 젊은이들이 기타를 가지고 노래하며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23
  • 24. 1989년 9월, 시민 5,000여명이 시위 후 행진했다. 이 행렬은 1주일 후 20,000명으로 늘어났다. 시민들의 참여가 점점 조직화되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자 슈타지는 적극적으로 나서 시민들을 탄압했다. 그냥 길을 걷던 시민들을 강제 연행하여 이들의 눈을 가리고 밤에 차로 이동하여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마구간과 같이 외진 곳에 갇혀 맞거나 협박을 당했다. 슈타지는 위의 마구간처럼 사람들을 잡아와 협박하고 어르며 통제할 목적을 가진 외진 곳들은 이미 1967년 부터 물색했다. 1989년 10월 9일, 모든 주요도시에서 평화시위가 일어났다. 정부는 즉각 한 번만 더 시위를 할 때 무력진압을 예고했으나 시민들은 20,000명이 모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경찰이 시위 현장에 도 달했을 때 ‘90,000명이나 모였어!’라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시민들이 모였고 경찰들은 진 압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슈타지 역시 진압 여부에 대해 베를린의 지시를 기다렸으나 연락은 오 지 않았다. 게다가 시민이 먼저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경찰은 진압할 명분도 없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 중 흥분하여 경찰을 건드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놀라 운 일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평화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대규모 시위 이후 정부는 언론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여행관련 법을 개정하겠다고 했 고 샤보프스키 공보비서는 그 효력이 언제부터인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고 대답하 며 장벽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다. 24
  • 25. <질의응답> 청년평화기획단(청년): 본격적으로 시위 등 시민운동을 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나? 트라우트 홀리처 여사(홀리처): 나는 목사의 딸이다. 부모님은 동독에 대해 한 번도 좋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도 10학년까지 학교에 서 공부했다. 이후 대학에는 가지 못했고 책을 제작하는 일을 하고 성악을 공부했다. 현 재 4명의 자녀가 있으며 내가 부모님에게 교육받은 것처럼 나도 자녀들에게 동독을 비판 하고 반대하는 교육을 했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이후 슈타지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자유를 위 해 싸우는 일은 잠시만 손을 놓아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일을 했다. 현재 과거 시민운동의 과정과 역사를 알리는 전시를 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보 고 느낀 것들을 빨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전시 때 1,000명 넘게 방문했고 이 반응에 힘입어 행사를 더 크게 해야겠다고 느꼈다. 일어난 일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지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89년 이후로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89라는 숫 자는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 ‣ 진행중인 전시회를 직접 소개해주고 있 는 홀리처 여사님. 청년: 처음 시위를 기획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는가? 그리고 이후 통일을 경험 한 20년간 어땠는지 궁금하다. 홀리처: 시위를 기획하며 작은 일과 사건들을 겪으며 재미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법의 테두 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끌려가는 건 두려웠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두려 워서 ‘아니오’라고 할 것을 ‘예’라고 하지 않는 것은 내게 너무나 중요했다. 장벽이 없어져 야 한다는 바람을 항상 갖고 있었고 통일 이후에는 계속 행복하다. 그러나 개중에는 더 어려워진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동독 시절이 훨씬 더 나았어.”라고 한다. 나는 통일 이후에 학교교육이 달라진 것이 너무 좋다. 여행, 소비, 건강의 자유를 얻어서 좋다. 옷 입는 자유, 책 읽는 자유, 사상의 자유, 자유의 세상이 온 게 너무 좋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핵무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는 것은 위 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 홀리처: 여기에 덧붙여 남북관계에 대해 조언을 하고 싶다. 교류가 무척 중요하다. 감옥에서만 살 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라이 프치히처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25
  • 26. £ 성 니콜라이교회 (8.18, Leipzig) 1. 성 니콜라이 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창설되었다. 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 의 교차점에 건설됐으며, 중세에 있어서 상인들의 수호신인 니콜라이에게 봉헌됐다. 지금도 이 교회는 시내 중심의 상가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원래 니콜라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었으며, 서편의 외관은 지금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 다. 16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양식의 홀식교회로 증축이 됐으며, 현재에도 교회 외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3개의 탑은 17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내부는 아주 매력적이 며, 그것은 건축사도트에 의해서 프랑스 양식을 모방한 의고주의4)적 양식으로 1784년에서 1797 년에 걸쳐서 완전히 개장됐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자신의 문화의 고귀성을 세계에 보여주기를 원했다. 특히 종려나 양으로 만들어진 기둥은 아주 인상적이며, 천정과 2층 의자에 마련된 풍부한 장식이 주의할 만하다. 당시의 화가 외서(A.F Oeser)는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교회의 현관과 제단에 있다. 제단 위에 있는 평화의 천사 모티브는 대단히 진귀하다. 153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이 행해진 이후 이 교회는 개혁교회로 변해 예배를 보게 됐다. 1723년~1750년에 걸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서 교회음악의 활동을 한 때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바흐의 주요한 작품들이 여기서 초연이 됐다. 1858년~1862년에 걸쳐 서 바이센펠스 출신의 라데가스트가 오르간을 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르간 중 가장 중요 한 작품이며 20세기에 공기순환의 전통화로 현대화됐다. 2. 1989년 가을의 경험, Pfarre C. Fuhrer(휘러 목사) (출처 : 니콜라이 교회 내 인쇄물) "니콜라이 교회-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는 1989년 가을에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침내 구동독 전 지역의 사 람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출국을 요청하는 사람, 호기심을 가진 사람, 반정부 분자, 비밀경찰들, 교회관계자, 공산 당원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이들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벌려진 팔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9년~1989년 사이 에 정치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던 것 만나고 싶었으나, 목사님 사 입니다. 정으로 못 만난 휘러목사님. 라이프치히에 종교개혁이 행해진 바로 450년,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176년 후 다시 이 도시는 역 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89년 이후 니콜라이 교회에 통하는 거리는 경찰에 의해서 규제되고 봉쇄됐습니다. 이 후에는 라이프치히에 통하는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의 출구는 광범위하 게 경찰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또한 평화의 기도 시간에도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동독 정부 관 4) 예술 작품의 표현에서, 고전적 작품의 양식을 본뜨려는 주의. 고전주의(古典主義). 상고주의(尙古主義) 26
  • 27. 리들은 평화의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적어도 니콜라이 교회에서 교외로 옮기도록 우리들에게 압력을 강화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평회 기도회와 관련된 체포 또는 임의동행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2000석이 꽉 차도록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운명의 10월 9일이 다가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폭력에 의한 진압이 군대, 전투요원, 경찰 그리고 사복경찰들에 의해서 획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 7일, 동독 의 건국 40주년 기념의 날, 동독 역사에서 국민 애도의 날로 모든 행사가 벌써 시작이 된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에 10시간 동안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무저항,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트럭 으로 이들을 날랐습니다. 이 중에 수백 명은 마르크클레베르크의 마굿간에 감금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무력을 갖고, 결국은 이 ” 반동 혁명”을 끝내야 하며, 진압해야 한다- 그래서 10월 9일은 험악했습니다. 약 1000여 명의 공산당원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벌써 오후 2시경에는 교회의 중간에 약 600명이 교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규칙 적으로 기도에 수 없이 참석한 비밀경찰의 임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들도 동시에 교회의 이야기, 복음의 말씀과 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수많은 비밀경찰들이 월요일마다 와서 산상수훈에 행복론을 듣는데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이것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관 련이 없는 모르는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을 공산당원을 포함해 모두가 듣게 됐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지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 "고 말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지 "적대자를 말살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그는 "첫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 "모든 오래된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조심 걱정하라고 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셨지, "너희는 크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는 믿지 못할 정도의 정숙과 집중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즉 주교의 축도가 있기 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 마스어 교수의 호소문 을 낭독했습니다. 즉 비폭력을 위해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중에서 쌍방의 공통점, 교회와 예술, 음악과 복음간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회는 주교의 축도와 인상 깊은 비폭력의 요구로 끝이 났습니다. 예배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자(나는 이 광경을 일생 잊을 수가 없는) 광장 에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과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습 27
  • 28. 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는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서는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들고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 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비폭력주의의 예수님 정신은 대중을 사로잡아 실재적이고 평화적인 힘으로 변했습니다. 군인, 전 투부대,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철수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상대 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 대한 기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폭력의 운동은 단지 몇 주 밖에 유지되지만, 당의 독재와 지배적인 세계관을 붕괴시켰습니 다. 예수님은 권력자를 왕좌에서 넘어뜨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높이십니다. "군대와 권력으 로 아니고 주의 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의 중심부와 거리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어지지 않았습니 다. 비폭력의 안에서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에 속 한 진더만은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준비했다. 단지 촛불과 기도 외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니콜라이 교회에 실업문제 대책 이니셔티브가 생겼 습니다. 이렇게 니콜라이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 희망의 집, 피난처와 출발의 장소로 - 퓌러 목사(Pfarre C. Fuhrer) 3. 관련자료 (중략) 그런데 이 도시의 한복판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 니콜라이 교회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1980년부 터 당시 해마다 증강되는 서독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의 기 도회’가 열리면서 부터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989년 10월9일에는 기도회를 끝마친 2000여명의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일통일을 외치면서 결국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되었 던 것이다. 그 후로도 ‘평화의 기도회’는 계속 열려 전 세계의 가난과 질병, 파괴되는 환경, 그리고 전쟁과 핵 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해내자는 간절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교회의 입구에는 여기를 찾아오 는 방문객들이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28
  • 29. 그런데 라이프치히에는 이처럼 교회의 사회 참여를 보여준 성 니콜라이 교회가 있는가 하면 영성 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성 토마스 교회도 있었다. 두 교회는 봉사와 영성,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 ‘세상 속으로’ 와 ‘하늘을 향하여’로 기독교 복음의 양축을 대변하며 신앙의 균형을 보여주는 것이 이채로웠다. (후략) 출처 : http://www.e-radiokorea.com/board/bbs/board.php?bo_table=column_kim&wr_id=24&page=3 무엇이 독일의 무혈통일을 가능케 했나 -김기석 목사 분주한 일정을 쪼개어 라이프찌히를 찾은 것은 괴테나 실러,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발자취를 더듬 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어앉은 성 니콜라이 교회를 보고 싶었기 때문 이다. 사회주의가 흔들리고 있던 1980년대, 그곳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 교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토론하던 이들의 숨결 을 느끼고, 수많은 군중들이 집결했던 광장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새겨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땅 곳곳에서 공권력과 시민들이 충돌하는 현실이 없다면 그 먼 곳까지 찾아갈 생각을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머물고 있던 베를린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도시였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 은, 22년 전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던 비폭력적인 저항운동의 성공 사례를 눈으로 보고 또 그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앙역을 지나 상가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가는데 문득 니콜라이 교회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던 경찰들과 시민들의 긴장된 모습을 머리에 그려졌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성 니콜라이 교회가 서 있었다. 중세부터 상인 들의 수호자로 숭앙되었던 성 니콜라이를 기념하기 위해 1165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시작되어 후기 고딕 양식이 가미되었고, 3개의 탑은 바로크 양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 정문에 서는 순간 ‘모두에게 열린 교회’(Kirche offen für Alle)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 다. 독일의 많은 교회가 사용하는 문구이긴 하지만 성 니콜라이 교회이기에 이 말은 강렬하게 다 가왔다. 지치고 상한 영혼,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하는 주님의 품이 절로 느껴졌다. 이 문 구는 냉전 시대에 니콜라이 교회가 감당했던 역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성 니콜라이 교 회는 1982년 9월부터 "칼을 쳐서 쟁기로"라는 슬로건 하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 기도회 를 개최했다. 이 연약한 기도의 촛불이 독일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군비경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때 크리스치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는 평화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평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공산주의자와 반체제인사 등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열 린 교회’라는 입간판은 한국에서 찾아간 내게 교회가 과연 무엇인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하 는지를 언중유골로 들려주고 있었다. 고난받는 이들의 피난처 구실을 포기한지 이미 오래인 한국 교회의 현실이 떠올라 둔중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9
  • 30. 초대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종려나무 모양의 기둥들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 회중석을 지나 제단 앞에 이르렀을 때 나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을 제단 위로 초대합니다"라는 안 내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가장 거룩한 자리라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여타의 교회와는 분명히 구별되었다. 제단 좌우측 벽면에 그려진 외저(A.F. Oeser, 1717-1799)의 성화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삼은 펠릭스 파이퍼(Felix Pfeifer, 1871-1945)의 부조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젠체하는 내색 없이 마치 안방을 내주는 것 같은 느낌 이 들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제단에 오르기 전 회중석에서 보아 제단 우측면에 놓인 나무 십자가 를 유심히 보았다. 그것은 1980년대 초반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를 위한 열흘" 기도 모임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십자가, 다만 한복판에 촛농 이 흐른 자국만 남아 있는 십자가는 암울한 현실에서 빛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십자가는 반대편 벽면에 부착된 16세기의 십자가 고상과 더불어 전통과 현 대의 아름다운 대화를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통을 계승하되 시대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창조적 으로 응답할 때 교회는 비로소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제단 바로 위 천장 가장 높은 곳에는 평화의 천사가 무지개를 손에 쥐고 있는 외서의 그림이 눈 길을 끌었다. 외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길래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성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 사역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예비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초를 구입해 불을 밝힌 후 회 중석 한 가운데 놓인 촛대에 올려 놓느라니 저절로 경건한 기분이 들었다. 촛불을 밝히고 몇몇 사 람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어둠이 짙었던 시기, 복음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 던 크리스치안 퓌러 목사와 1989년의 시위를 목도하며 천안문 사태와 같은 유혈 참극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민중들 편에 서서 비폭력적인 저항을 이끌었던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의 세계적 인 지휘자 쿠어트 마주르(Kurt Masur), 그리고 신학자 침머만(Zimmermann)박사가 그들이다. 그 들은 동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참다운 의미의 지성인들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세속적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그들이야말로 믿음이 무엇인 지를 보여준 증인들이었다.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기도회가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시화되고 있을 때, 수많은 이들이 운집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당국은 성 니콜라이 교회로 가는 길목을 차단 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어떠한 방해도 평화를 향한 갈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안담당자는 조직에 속한 700여 명의 사람들을 성 니콜라이 교회에 보내 미리 자리를 차지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뜻하지 않게 좌절되고 말았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목 사를 통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세속사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그 가르침은 그들 의 가슴에도 어떤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필연은 언제나 우연의 옷을 입고 등장하게 마련이다. 인 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하다는 바울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1989년 10월 9일은 정말 역사적인 날이다. 평화와 시민의 권리 그리고 인권 신장을 요구하는 3000여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어 성 니콜라이 교회, 성 토마스 교회, 성 요한네스 교회를 가득 채 웠다. 민주화의 수확기가 도래한 것이다.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고, 개혁 교 회에서는 한스 유르겐 지버스(Hans-Jürgen Sievers) 목사가 좋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거 기에 이르는 길이 옳아야 하고 사용하는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며 비폭력을 호소했다. 성 토마스 교회는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했고, 몰려든 이들을 향해 리히터 30
  • 31. (Johannes Richter) 목사는 잠언 25장 8-9절("너는 서둘러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 웃에게서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 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아라")을 본문으로 삼아 인내의 용기와 격분을 거절하는 슬기를 발휘하자고 설교했다. 성 미카엘리스 교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날 처음으로 평화 기도회를 위해 교회를 개방한 게르트 크룸프홀쯔(Gerd Krumbholz) 목사는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서, 지금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용기의 결여와 두려움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했 다. 무혈혁명은 이렇게 마련되고 있었다. 광장과 길거리에는 이미 70,000여 명의 시위대가 운집해 있 었다. 그들은 유리 창 하나 깨지 않았다. 1989년 10월 9일은 비폭력 저항운동 역사에 도 하나의 이정표가 놓이는 날이 되었다.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경찰은 결국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라이프찌히 중앙 위원회의 치안 책임자였던 밀케(Mielke)는 죽기 직전에 "우리는 만 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으나 기도와 촛불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날의 무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 광장 곁에 세워놓은 대리석으로 만든 종려나무 기둥 조 각은 어떤 경우이든 비폭력적인 저항과 평화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그 광장 을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1723년부터 1750년까지 이 교회의 오르 간 연주와 지휘를 맡았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요한 수난곡’이 들려오는 듯 했다. ‘주여, 이 땅의 영예로운 통치자여! 당신의 수난에 의해 참된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이 어느 때에도 최적의 시기에도 찬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시옵소서’ 라이프찌히 거리를 걸으며 나는 새삼스럽게 길을 묻고 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그리 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출처 : http://well.hani.co.kr/52704 by 청춘개미 31
  • 32. £ 독일 화합과 희망의 상징,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독일통일기행 5일째날, 세계 2차 대전 당시 도시의 90%이상이 파괴되었던 드레스덴을 가보았다. 드레스 덴은 "독일의 피렌체"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궁전과 고전양식의 건물들이 많았고, 강가를 따라 이어진 테라스에서 여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드레스덴을 방문한 목적은 이러한 아 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라우엔교회(Frauenkirche)를 방 문하여 교회 목사님과 동서독 통일 후 교회 재건을 주도했던 시민을 만나 인터 뷰하는 것이었다. 프라우엔교회는 세계 2차 대전 후 통 일 전까지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89년 통일 후에는 시민들이 주도한 교회 재건으로 인해 독 일의 화합과 희망을 상징하게 되었다. 32
  • 33. ‣ 세계2차대전 후 파괴된 프라우엔교회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라우엔교회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부서진 건물 잔해를 주 워 번호를 매겨 각자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는 것은 꽤 알려 진 이야기다. ‣ 추모의 십자가 전쟁으로 교회 건물이 불탄 후 무너진 잔해 속에 남아있던 꼭대기 십자가. 불에 녹아 모양이 일그러졌지만, 이 십자가는 현재 전쟁에 대한 반대와 용서의 의미를 담아 프라우엔교회 내부 한켠에 보존 및 전시 중이다. 프라우엔교회가 지금과 같이 온전한 모습을 하게 된 데에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힘이 컸다. 독일통 일기행을 준비하던 중 프라우엔교회 복원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아닌 시민들의 간절한 바 람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구 동독지역의 드레스덴을 방문해 전쟁 후 분단 당 시의 상처와 분위기를 보고자 했던 우리는 프라우엔 교회를 방문하여 인터뷰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를 맞이해주신 분들은 1990년부터 현재까지 프라우엔 목사로 계시는 Holger Treutmann목 사님과 Citizen Action Group의 멤버로 통일 후 "Appeal from Dresden"을 만드신 Köckeritz 박사 님이 였다. 33
  • 34. ‣ 설명중이신 Köckeritz 박사님 Köckeritz 박사님은 구 동독 시절부터 건축가로 일하셨는데 특히 역사적 건물 재건에 주로 관여 하셨다고 한다. DDR시절부터 프라우엔교회는 무너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당시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15년 넘게 프라우엔 교회를 비롯한 주변 건물 복원에 대한 토론과 회의는 계속되어 왔었다. 80년대 동독은 프라우엔 교회와 주변 건물을 드레스덴을 대표하는 것이자 상징하는 것임 에 합의 발표하고 복원이 언제 진행될지 모르지만, 주변 지역의 개발을 제한했다. 프라우엔교회는 드레스덴을 가로지르는 엘베강의 곡선을 따라 마을 광장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거리가 연결되고, 강 건너 뿐 아니라 마을 어디에서나 교회를 볼 수 있도록 설계된 중요한 곳이었다. 교회는 도시 건축적 관점에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작센주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큰 교 회 건물 중 하나라는 상징성도 있었다. 교회가 지어진 직후 당시 제후의 폴란드 출신 부인이 카톨 릭이라 성당을 지어줬는데 그 성당과 경쟁관계였고 그런 관계를 통해 지역 경제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재건을 위한 시민단체 모임은 독일 통일 1년 전인 1988년도에 결성되었는데 큰 조명을 받지 못 하다가, 1990년에는 통일이 되면서 통합의 물결 속에 관심이 커지고 시 차원으로 사안이 확장된 다. 1989년 11월 첫 공식발표가 있은 후 1990년 2월에 재건에 관한 구체적인 발표가 이루어진 다. 그 동안 지속되어왔던 연구들을 합하여 언론에 모델, 사진등과 함께 공개하였다. 당시 대변인 이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는데 그로 인해 더 많은 조명을 받게 된다. 1989년까지는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상 조항이 전혀 없었으나, 90년대 초 사업차원에서 구체 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논의의 급선무는 복원 자체에 관한 합의를 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 부분의 사람들이 재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잔해 사진들을 보며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님들과 교회 대표들은 프라우엔교회가 드레스덴의 유일한 개신교 교회라며 재건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34
  • 35. 당시 지지자들은 교회의 잔해들을 전쟁의 기억으로 남기고자 하였는데, 폐허 상태로 남기기보다는 복원을 할 때 잔해를 이용하면 상징성이 더 커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후에 사람들이 복원된 건물에 박힌 검은 잔해를 보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전쟁과 과거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 목사님과 박사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YP4Peace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당연히 재정문제가 논의되었다. Citizen Action Group의 의지 는 교회 건축을 모두 기부금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으로 따지면) 도지사가 총 비용 의 80%를 도에서 부담을 하고, 20%만을 기부금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금 결과 독일 전 역에서 건축 비용의 3분의 2에 달하는 현재 금액으로 175억 유로가 모금되었다. 이는 교회가 50 년 넘게 비참하게 무너져 있었던 것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전쟁의 상처로 남았고, 또 사람들이 그 만큼 교회 복원에 관심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시민단체 멤버들의 공헌이 컸는데, 한 예로 단체의 대변인은 트럼펫 연주자였 다. 그는 앙상블을 3개나 하면서 라이프치히, 베를린 등 전국을 돌면서 모금을 위한 공연을 1500 회나 하였다. 콘서트 자체로는 큰 액수가 모금되지는 않았지만, 공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큰 감동 을 받았고, 콘서트가 끝난 후에는 전보다 훨씬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 그 다음으로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드레스덴 은행의 노력이다. 은행원들은 기부금 편 35
  • 36. 지를 만들어 판매하여 돈을 모았고, 은행은 보유하고 있는 금, 은, 동 등을 기부하였다. 1~2년 안 에 재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시의회는 이를 강력히 밀어주었고, 드레스덴 시도 비용의 3분의 1 에 해당하는 공공자금 조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공사는 어느 정도 비용을 모은 후 시작했지만 공사속도가 너무 빨라 예산이 부족하게 된 적도 있 었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교회가 점점 형상을 갖추자 점차 프라우엔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긍정적 인 관심이 높아져 1993년부터는 주립교회, 드레스덴시, 자유작센도시에서도 복원에 참여하였다. 드레스덴 시의 주된 역할은 프라우엔교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공공자금을 마련하는 것이고, 주립교회는 토지 재정비와 기부금 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일어나서 설명하시는 부분] 노란색으로 표시된 것(오른쪽 사진 참고)이 공사 진행 정도이다. 건물 아래 부분이 지어진 후 위 부분의 공사를 진행하면서 예배를 시작 하였는데, 예배 기부금만 200만 유로 가량이 모금되었다. 현재 교회의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와 작은 돔은 교회 재건에 관심을 가진 영국이 우리도 돕겠다 고 하여 직접 제작하여 보내준 것이다. 우연찮게도 십자가를 주조한 사람의 아버지가 2차 대전 당시 공군이었는데, 그 때 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공사는 2005년에 완료되었다. 1993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이후 13년간 사고가 한 번도 없었고 관 심도 높았으며 예산도 부족하지 않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공사를 하면서 이를 경우는 독일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책임자들은 이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36
  • 37. Holger Treutmann 목사님 말씀 ‣ Holger Treutmann 목사님 프라우엔 교회 자체만 보면 유럽의 작은 점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왜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샀는 지 철학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의미는 분단과 냉전시기에 도시 자체가 경계도시를 상징하는 곳 중 의 하나였다. 폴란드 체코 등과 접경하여 서구와 동구가 부딪히고 대립되는 곳이었다. 50년 넘게 진행된 냉전시기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통일을 통해 이념과 갈들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여러 차이가 발견되었는데, 교회 재건을 통해 양 체제의 이질성을 좁혀가고자 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 다. 이는 단순히 교회의 재건이 아니라 유럽의 통합과 세계의 평화를 상징한다. 정부차원의 갈등 이나 개인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갈등에서 파생되는 것은 적개심밖에 없다. 그 적개심을 치유하고 줄여가기 위한 길을 찾는 사람들은 늘 있었고, 그 결과가 재건 사업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 교회 구석구석을 안내해주시는 모습 ‣ 교회 투어 중인 YP4Peace 목사님 Q: 한국에서도 그런 적개심,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분단된 현실에서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또는 적개심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있는 지 궁금하다. 37
  • 38. YP4Peace: 한국 사회에서는 통일이 점점 잊혀지고 분단이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독일에 와서 보려는 것은 우리가 좀 더 분단에 대해 알고 독일은 어떻게 통일하고 통합해 갔 는지 눈으로 보기 위해서이다. 들으면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구나 해서 기 뻤다. 한국은 통일을 사회 이슈로 만들어가야 하는 수준인 것 같다. 박사님 : 분단시절 동·서독은 적어도 편지나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힘들긴 했지만 가능하기는 했다. 남·북한의 관계와 비교했을 때 독일이 더 상황아 나았고, 통일도 더 쉬웠을 것 같다. ‣ 한국에서 준비해온 선물 증정 ‣ 감사한 마음을 담아 교회 헌금 목사님 : 최근 독일에서 여자 축구 월드컵이 있었는데, 미국과 북한의 경기가 드레스덴에서 있었 다. 목사님과 몇몇분이 경기 후 콘서트를 마련하였다. 콘서트는 편안한 만남과 대화의 장을 만들고자 한 것이었고, 차도 마시며 우리가 준비한 글을 읽으며 서로에 대한 불편 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그런 자리였다. 글을 보낸 후 미국팀 대표들은 참석하겠다고 답했 고 실제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결국 오지 않았다. 정말 아쉬웠다. 내년 5월에 세계의 젊은 청년들을 초대하여 평화와 이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전세계의 갈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해소하며 화 합하려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국이 멀긴 하지만 오면 좋겠다. by 영현 38
  • 39. 한국에 돌아와서 프라우엔교회 트루먼 목사께 작은 선물과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감사하다며 메일을 보내주셨다. Dear Yunghyun, it was a great pleasure for me to have you here as interested visitors in Frauenkirche Dresden. Thank you very much for all kindness during your stay here with me and Dr. K=F6ckeritz.(?) I also want to thank you very much for the gift that reached me from Korea with the good wishes for us. I hope we have the chance to meet again in the future. God bless your work for peace an reconciliation. Sincerely Yours Holger Holger Treutmann Pfarrer der Frauenkirche Dresden 39
  • 40. <쉬어가기> 100인+@ 거리인터뷰 이야기 이곳은 베를린 2011년 8월 15일 날씨 맑음. 이 날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 단순 히 휴일로 생각하고 넘어가버릴 수 있는 날이었지만, 독일에서 보낼 815는 특별해야 했다. 독일로 출발하기 전부터 우리는 독일, 베를린에서의 광복절을 어떻게 보낼지 수많은 고민과 토론을 했다. 그래서 결정된 815 마라톤과 거리인터뷰. 전 날 밤늦게까지 인터뷰 준비를 하고 새벽부터 부지런 히 일어나 마라톤과 인터뷰 준비를 했다. 오전에 마라톤을 마치고 숙소에서 노란 단체티로 갈아입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독일인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인터뷰에 응해주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그래서 최대한 설문을 간단하고 재밌게 할 수 있도록 커다란 판에 O/X로 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고 색도 알록달록 눈에 띄게 만들었다. 그렇게 재미난 설문으로 다가온 사 람들에게 좀 더 세부적인 질문을 하기로 나름의 전략을 짜고 역할을 나눴다. 40
  • 41. 우리의 인터뷰 전략지는 분단의 상징에서 독일통일의 상징이 된, 늘 사람으로 붐비는 ‘브란덴부르 크 문’ 앞의 광장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는데 그곳엔 관광객이 굉장히 많이 온다 는 것이었다. 이러다 독일인보다 관광 온 외국인만 인터뷰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막상 도착 하고 나서야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외국인인 주제에 (그들이 독일인인지 확인 하기 위해) 그들에게 “Where are you from?"을 반복해 많은 현지인들을 황당하게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어도 시원찮을 물음을...흐흐) 우선 O/X 인터뷰의 질문은 이렇게 4가지였다. <질문1>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Do you have any interest in the topics of "divided nation" and "reunification"? <질문2>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unification changed the German society positively? <질문3>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Do you think Germany is reunified "completely"? <질문4>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Do you think the unification of two Koreans is possible? 41
  • 42. 우리와 동행해준 독일 유학생 ‘조선희’샘의 도움으로 영어를 못하는 독일인들을 위해 영어와 함께 독일어도 적어두었다. 실제로 영어에 서툰 10대나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의 설문을 받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대상은 브란덴부르크문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고, 독일인과 비독일인으로 나누었다. 거기에 4가지 색깔의 스티커로 10대, 20~30대, 40~50대, 60대 이상으로 세대별 답변도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우려와 달리 사람들이 굉장히 밝게 우리의 설문에 응해주었다. 노 란 단체티와 화려한 머리띠로 시선을 끌고 색색 스티커로 재미를 유발하게 한 전략이 먹혔던 것 같다. 외국인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의 나이에 맞는 스티커를 고르고 고민해가며(재밌어 하며) 설문을 하는 모습에 우리는 흥이 나서 더 열심히 사람을 모으고 설명을 했다. 스티커 설문 자 중 독일인을 대상으로 깊이 있는 세부 인터뷰도 진행했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았고 독 일 내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도 생각보다 아주 많았다. 전 세계인들과 직접 부대끼며 소통한다는 것이 더욱 좋았다. 42
  • 43.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우리는 약 130명가량의 설문을 받았다.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모르게 목표했던 100명의 설문을 훌쩍 넘었다. 사실 O/X 스티커 붙이기는 답변이 너무 편중되어 답변 자 체로 보면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베를린 거리설문 분석표>   1번 질문 2번 질문 3번 질문 4번 질문 10대 34 33 30 30 20~30대 20~30대 52 49 42 51 40~50대 32 26 28 29 60대 이상 14 14 14 14 합 계 132 122 114 124 1번 질문. ‘분단’, ‘통일’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나요? 1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6 14 30 20~30 10 37 47 O 40~50 8 22 30 60 이상 8 5 13 소계 42 78 120 10대 2 1 3 20~30 1 3 4 X 40~50 0 1 1 60 이상 0 1 1 소계 3 6 9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32 43
  • 44. 2번 질문. 통일이 독일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나요? 2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7 16 33 20~30 8 40 48 O 40~50 7 19 26 60 이상 7 6 13 소계 39 81 120 10대     0 20~30     0 X 40~50     0 60 이상   1 1 소계 0 1 1 10대     0 20~30   1 1 ? 40~50     0 60 이상     0 소계 0 1 1 합 계 122 44
  • 45. 3번 질문. 독일이 완전히 통일되었다고 생각하나요? 3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6 2 8 20~30 2 5 7 O 40~50 3 2 5 60 이상 1 3 4 소계 12 12 24 10대 14 7 21 20~30 4 30 34 X 40~50 10 12 22 60 이상 6 4 10 소계 34 53 87 10대   1 1 20~30   1 1 ? 40~50 1   1 60 이상     0 소계 1 2 3 합 계 114 45
  • 46. 4번 질문. 한국은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4번 질문 독일인 비독일인 소계 10대 12 14 26 20~30 9 37 46 O 40~50 11 15 26 60 이상 8 5 13 소계 40 71 111 10대 0 1 1 20~30 1 3 4 X 40~50 1 0 1 60 이상 1 0 1 소계 3 4 7 10대 3 0 3 20~30 0 1 1 ? 40~50 2 0 2 60 이상     0 소계 5 1 6 합 계 124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