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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연재 손정의 회장의 삶과 경영 자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이디어 짜내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⑦ 주식 상장 성공
⑧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⑭ “회사 살 수 있을까” 대신 “협력할 수 있을까”를 묻다
⑮ 트위터에서 내 별명은 ‘야리마쇼(やりましょう·합시다)
(16) 30년 300년 비전을 가져라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18)·끝 “내 기업만 잘 꾸린다? 그것만으론 안 되는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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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6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신문물
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
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
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
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
                 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
                 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
                 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
                 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
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
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
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
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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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5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소프트
뱅크 제공]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
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
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
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
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
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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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지 치는 집 아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제공]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
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
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
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
(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
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
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
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
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
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
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
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
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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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
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
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
"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
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
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
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
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
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
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
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
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제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
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
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
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
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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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
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
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
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
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탈번(脫藩)= 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
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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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6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친척·선생님 결국 설득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
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
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
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
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
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
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
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
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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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
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
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
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
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
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
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
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
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
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
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
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손정의 부친의 교육열=손정의 회장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교육열이 높았다. 손 회장이 중학교
에 입학하자 대도시인 후쿠오카로 이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회장은 그곳에서 명문고 진학
률이 높은 조난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지역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합격해 가족을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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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어떻게      온 미국인데” … 2주 만에 고교 3년 뗐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7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6월 나란히 방한한 손정의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한국이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김대중 대통령의 물음에 손 회장은 "첫째도,
                    둘째, 셋째도 브로드밴드(초고속인터넷)"라고 답했다. 게이츠 창업
                    자 역시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한국이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엔 이들의 만남이 있었다. [중앙포토]


                    1974년 초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57년 8월생인 나는 아직
                    만 16세였다. 홈스테이를 하며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았다.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세라몬테고등학교 10학년
                    으로 편입했다. 10학년은 한국 학제로 치면 고교 1학년에 해당한
                    다.


 내 마음은 급했다. 정말 어렵게, 무리해서 추진한 유학이다. 어떻게든 빨리 대학에 가 치열하
게 공부하고 싶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읽었
다.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과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다. 한데 선생님은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줬다. 11학년 교과서
를 모두 구했다. 이어 사흘간 전체를 섭렵했다. 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3일 뒤, 교장선생님께 선언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선생님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고 했다. 속으론 아마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
이 너무 많았다. 손을 번쩍 들고 감독관에게 말했다.


 "전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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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이 돌아와 말했다.


 "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


 원래 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손
을 들었다.


 "사전을 찾아야 해 시간이 배로 필요합니다. 종료 시간을 늦춰주십시오."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 19세,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다




하지만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
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다.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다. 덕분
에 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세. 나는 웅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름하여 '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앞으로 50년 동안 내가 도전할 것들, 이뤄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전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내
삶은 온전히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계획을 바꾼 적도, 목표치를 낮춘 적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다.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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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본 사진 … 감격해 울었다




인텔의 1974년 작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


 대학에 입학한 뒤엔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교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화장
실에 갈 때도 교과서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왼손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움직이며 눈은 교과서에 못 밖은 채 아무 것
이나 짚이는 대로 입에 넣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두 눈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여
유 있게 식사하는 사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폐렴에 걸린 줄도 몰랐다. 기침이 계속 터져
나오고 목에선 쌕쌕 소리가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그저 책만 봤다. 쉬
는 시간은 오직 잠 잘 때뿐. 그마저도 최소화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
었다. 피 토하는 아버지, 오열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온 유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왜 우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물론 일본에 있을 땐 나도 불평 많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선 그럴 수 없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본업 중의 본업에 목숨을 걸자. 죽어라 공부하지 않
으면 벌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나 자신을 몰아쳤다.


 그 무렵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충격적 사건을 접했다. '일렉트로닉스'라는 과학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무슨 미래도시의 설계도 같은 컬러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희한하게 생겼
네?' 다음 페이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인텔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온몸이 마구 저렸다. '인류가 드디어 이
런 엄청난 일까지 해냈구나.'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갈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발명이다. 컴퓨터다. 그 길을 가겠다.'
소프트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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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
이디어 짜내    열아홉 살 대학생 사업가, 교수·기업을 설득하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0


열아홉 살, 어렵게 들어간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 발명에 몰두
했다. 잡지에서 우연히 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사진과 기사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사진을
오려 매일 들고 다녔다. 잘 때는 베개 밑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이 작은 칩 하나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나도 여기, 컴퓨터에 걸겠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집에선 내 유학자금으로 학비를 포
함해 매달 평균 20만 엔가량의 돈을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5분을 발명에 할애하기로 했다. 5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걷고
밥 먹을 때조차 책을 볼 만큼 목숨 걸고 공부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하루 한 가지씩을 고안한 뒤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것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한 1000만 엔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대범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비현실적이
다" "차라리 학교 앞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난 흔들리지 않았다.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자도 작은 발명을 토대로 회사를 일으켰다. 나라고 못
할 리 없어. 반드시 할 수 있다.'


  #공대 교수에게 "당신을 고용하겠다"
 정말 매일 하나씩 뭔가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 가지 접근법을 택했
다. 첫째, 주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는다. 둘째,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둥근 것을
네모난 것으로 바꿔보는 식의 변환을 시도한다. 셋째,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본다. 그러기
를 100일, 150일…. 대부분 시시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하나, 말이 될 법한 것이 있었다. 음성발
신기와 사전, 액정화면을 결합한 제품. 다중어 번역기였다.
 나는 경제학도다. 엔지니어링 지식이 부족하다. 시간도 없다. 나는 아이디어를 면밀히 다듬은
뒤 다짜고짜 공대의 포레스터 모더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음성 발신 기술의 권위자였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절
위해 팀을 꾸려 이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모더 교수는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상 같은 건 싫어하니까 일당은 선생님께서 정하세요. 특허가 팔리면 바로 정산해 드리겠습
니다. 물론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선생님 몫도 없습니다. 공짜로 일한 게 되는 거죠. 이런 조건,
어떠십니까?"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얘기지만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곧 내 아이디어를 현
실화하기 위한 팀이 꾸려졌다. 이들은 내게 매일 "헤이, 보스. 오늘은 뭘 하지?" 하고 묻곤 했
다. 나도 가능한 모든 시간을 짜내 개발에 매달렸다. 내가 유독 관심을 쏟은 건 '사용자 시각'이
었다. 나 자신 영어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전만 찾아선 정확한 영어 발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발명과 연결시킨 게 바로 번역기 아이디어였다. 그런 만큼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
어나냐'가 아닌 '사용하기에 얼마나 편리하냐'에 초점을 맞췄다. 1977년 특허를 땄고, 이듬해 시
제품을 완성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홍루(중국 이름 루훙량)와 '유니손 월드'라는 벤처기업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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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78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다. 특허를 팔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 대박을 치다
 먼저 오사카에 있는 마쓰시타전기를 찾았다. 마쓰시타 측은 "이미 제품을 개발 중이다. 관련
특허도 있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산요전기도 방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수십 개 회사를 전전했다. 샤프 본사를 찾았을 때 우연히 미국에서 안면을 튼 사사키 다다시 중
앙연구소장을 만났다. 사사키 소장은 내 열정을 높이 샀다. 시제품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마침
일본·미국·영국의 여러 회사가 다국어 번역기 개발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사사키 소장은 선뜻
2000만 엔을 내놨다.
 "이건 일·영 번역기 기술에 대한 개발비입니다.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그렇게 주
요 언어에 대한 기술을 개발할 때마다 이만큼씩 더 내놓겠습니다.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 주십
시오."
 그렇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샤프에 넘긴 특허는 79년 이 회사가 출시한 전자사전
'IQ3000'의 기반 기술이 됐다.
 이를 포함해 나는 모더 교수 팀과 한 프로젝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1억 엔(현재 환율로 약 15
억원) 이상을 벌었다. 애초 목표였던 1000만 엔의 10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것도 지금으로부
터 30여 년 전에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일본의 중고 게임기를
수입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카페 등지에 이 기기를 설치한 뒤 위탁 운영을 했다. 이 사업과
기타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다시 1억5000만 엔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을
통해 학비, 생활비는 물론 사업 밑천까지 마련한 것이다.


#결혼식 지각, 증인도 급조
 스물한 살, 나는 번역기 개발 이상으로 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결혼이다. 상대는 미국에
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일본인 유학생 유미. 너무 바빠 도서관에서 짬짬이 얼굴을 보는 게 다였
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내 아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운 뒤 흥분한 나머지 일장연설을 한 것도 그녀 앞에서였다.
 나는 유미와 미국에서 약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주례와 증인만 입회한 가운데 간단한 절차만
밟았다. 처음 잡은 날 번역기 개발에 몰두하느라 그만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주례가 화를
내며 가버려 새로 날을 택해야 했다. 두 번째로 잡은 날에도 결국 지각을 했지만 다행히 주례가
기다려줘 식을 마칠 수 있었다. 증인 섭외를 깜빡하는 바람에 교회 문지기에게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80년. 마침내 학교를 마친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요즘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 역시 모교인 UC버클리는 물론 하버드·스탠
퍼드·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전액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미련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
랐다. 대학만 졸업하면 돌아가겠다고 했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CPU) 기능을 대규모 집적
회로 칩에 탑재한 것. 인텔이 1971년 개발한 i4004가 효시다. 이로부터 컴퓨터의 대중화·소형
화 시대가 열렸다.
손정의 발명법
① 주변 문제를 해결하는 답 찾아라
② 큰 것은 작게, 네모는 둥글게 변환
③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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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직원     2명 앞에서 “30년 뒤 1조엔 매출” 연설했더니 … 두달 뒤 “미친 놈”하
며 떠나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2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 손정의 회장이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소프
트뱅크는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렸다가 손 회장의 도박과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첫 고객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직원수가 15명으로 늘었고, 또 한 달 뒤에는 100명 규모의 회사
가 됐다. 1년 뒤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매스컴은 손 회장
에게 '괴물 실업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프트뱅크 제공]


1980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하던 소프트웨어(SW) 업체 '유니슨 월
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홍 루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
스타컴을 창업했다. 귀국 뒤 1년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
였으리라. 친척들은 수군거렸다. "마사요시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다는 거야?" 정작 내 머리와 가
슴속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모가 시켜서,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돈
이나 벌겠다는 욕심에 뭔가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꿈은 사업가다.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뭘까. 남이 안 하는 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누
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또한 절로 열의가 샘솟으며,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고,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야여야 했다. 결론은 '디지털 정보혁명'. 그것으로 세
상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케 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 스물세 살
청년이 마침내 찾은 큰 뜻이었다.


# 디지털혁명의 도구, 소프트웨어 유통 


 누군가는 허황되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물론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좋다. 세
상 99%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나 정말 큰 꿈, 원대한 포부를 품
고 있다면 접근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먼저 큰 비전을 세운 뒤 그 실현을 위한 시간표를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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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터 현재를 향해 거꾸로 돌린다. 오늘 아닌 내일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배포로 승부하며,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경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어
                         쨌거나 난 자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혁명
                         의 도구'로 택한 건 SW 유통.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창업 전 나는 40여 개의 아이템을 검토했다. 80년대
                         초 일본은 PC 대중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PC
                         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우수한 SW가 있어야 한다.
                         미래는 SW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직접 SW 개발에
                         뛰어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승률이 너무 낮았다. 운
                         영체제(OS) 분야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는 미국 기업이
                         선점해 버렸다. 남은 건 응용 SW 분야인데, 이건 마치
                         모든 신곡이 히트칠 수 없듯 톱10 안에 들어가는 것만
                         대박을 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
                         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
                         실히 길다. 또한 압도적 지위를 획득할 경우 업계 성장
                         에 정비례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승률 70%. 나는
                         100여 개의 경영 포인트를 검토한 뒤 그렇게 결론 내렸
                         다.


                         # 선풍기는 도는데, 직원은 둘뿐인데 


                          81년 9월, 고향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서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건물 2층. 직원 두 명을 구했다. 첫날 그들을 앞
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한 시간가량 열변을 토했다. 곁에선 낡은 선풍기가 윙윙 돌았다.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거다. 30년 후엔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세듯 매출을 1
조(엔), 2조(엔) 단위로 세게 될 거다. 사업을 하겠다는 자가 1000억이니 5000억이니 하는 걸
숫자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두부가게 운운한 건 일본에서는 두부 한 모를 '1조'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
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둘 다 완전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들은 결국 두 달을 못 채우고 나가버
렸다. "저 인간 제정신이야?" "미친 놈!" 하면서.


 그렇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때 샤프사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SW
사업은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년 전 내가 미국에서 발명한 다
국어 번역기 기술을 거액에 선뜻 구매해 준 이였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도쿄 고지마치 4
번가에 있는 ㈜경영종합연구소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이어 연구소의 노다 가즈오 회장을 찾았
다. 명함을 건네며 "손 마사요시입니다. 재일 한국인입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미국 유학 이후
'야스모토'란 일본식 가짜 성(姓) 대신 진짜 성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노다 회장은 내 구상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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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니 "장래성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일본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격려해 주다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그는 사사키 전무와 함께 경험
없고 인맥 부족한 나의 귀한 멘토가 돼주었다.


# '괴물 실업가' 태어나다


 도쿄로 옮긴 얼마 뒤 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창업자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
을 털어 전자전시회인 '일렉트로닉쇼'에 참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 회사라
곤 달랑 이름뿐, 제품도 실적도 없었다. 난 못 들은 척 행사장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렸다. 거길
화려하게 꾸민 뒤 부스 없는 SW업체들에 무료로 대여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 광고 효과가 크
리라 봤다. 'PC 시대엔 SW가 중요하다, 그 SW를 나 손정의가 판매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렸
다. 흔한 카탈로그 대신 아예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전시회가 끝나자 회사는 파산 지경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신전기입니다. 일렉트로닉쇼에서 귀사의 부스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사카에 일본 최대
컴퓨터 매장을 내는데 거기에서 쓸 SW를 납품해 주시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회사였다. 유통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거래 실적 하나 없는 우리를 믿고 연락
해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물건을 떼 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소프트뱅
크는 당시 무일푼이었다. 나는 조신전기 사장을 찾아갔다. 내 비전과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선수
금을 청했다. 그 의지, 열정이 통한 걸까. 상대는 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사사키 전무의 도움도
컸다. 그가 집까지 담보로 넣어가며 보증을 선 덕분에 다이이치칸교은행으로부터 무려 1억 엔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5000만 엔을 들여 일본 최대 SW업체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
을 맺은 것이다. 유통의 힘은 제품 수급력에서 나온다. 당장은 5000만 엔이 큰돈이지만 그 투자
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올 것을 확신했다.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
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이 됐다. 83년 '주간 아사히'는 나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
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난 신이 났다. 곧 닥쳐올 불행은 꿈에도 모른 채.


◆100번의 노크(100 Knocks)=


손정의 회장이 창업 전부터 구상한 경영 진단 시스템. 특정 사업에 대한 100가지 지표를 그래프
화해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검토 항목을 1만 개까지 늘릴 수 있다.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는 손 회장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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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중앙일보] 2011.09.27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
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
고 한다. [소프트뱅크 제공]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
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
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
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
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료마도 나도 5년이다”


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
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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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
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
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
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
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
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
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
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
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
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
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자금 압박·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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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
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
했다.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
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
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
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
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소프트뱅크가 창업 초기 발간한 잡지들.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
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
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
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
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
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
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
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
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
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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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9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
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
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
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
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
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
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
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
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
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
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
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
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
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
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
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
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
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
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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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
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
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
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 & 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 & 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
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 & 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
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 & A다. 적
대적 M & 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 & 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
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
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
던 것이다.


◆손정의의 일본 귀화=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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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⑧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M&A는 전광석화가 기본 … 8억 달러 협상, 단 5분도 안 돼 끝내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04




1997년 8월 26일 손정의 회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컴덱스코리아 97'에서 김종필 당
시 자민련 총재에게 신형 노트북PC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95년 8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덱스를 인수했다. 세계 최대 IT미디어 그룹인 지프 데이비스
도 사들였다. 당시 한 해 매출보다 몇 배 더 큰 거래를 성사시킴으로써 손 회장은 단숨에 세계
IT 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나는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사업으로 이름을 알린다'는 20대 목표는 성공적
으로 달성했다. 30대 계획은 '1000억, 2000억 엔 단위의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1994년
만 36세에 주식 공개로 그 씨알을 마련했다. 남은 4년간 완성을 봐야 했다. 마침 인터넷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을 뚫고 전진하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했다. 나는 세계 정보
기술(IT) 정보의 길목을 잡기로 했다. 아시아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기로 했다. 주식
공개로 마련한 돈은 2000억 엔이었다. 그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 시스코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함께 일하며 미국 시장을 들여다본 터였다. 나는 30대의 승부를 그 땅에서 보기로 했
다. 1년 중 8~9개월은 미국에서 살았다. 목표는 이미 정한 터였다. 세계 최대 IT전시회인 컴덱
스, 그리고 역시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인 지프 데이비스 인수였다.


컴덱스 인수를 처음 마음먹은 건 93년 가을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덱스 쇼에
갔다가 오너인 셜던 G 아델슨 회장이 회사를 팔 거란 소문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회장실을 찾
았다. 거두절미하고 "컴덱스를 사겠다"고 했다. "돈은 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이름이 '뱅크(bank·은행)' 아닙니까. 왠지 돈이 무더기
로 들어올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넉살 좋게 답하자 아델슨 회장은 껄껄 웃었다. 나는 내처 "컴덱스를 사려는 건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PC업계를 정말 좋아한다. 회사를 인수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와 나 사이에 진심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반전과 집념의 협상 드라마
 1년쯤 뒤 마침내 컴덱스와 본격 협상에 들어갈 즈음 더 솔깃한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가 매각 절차를 밟는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것이
다. 지프 데이비스는 수많은 IT 관련 미디어를 생산하는 '정보 큰손'이었다. 여기서 발간하는 잡
지 PC위크는 세계 IT 종사자의 필독서였다. 광고 수익이 플레이보이나 포춘보다 많았다.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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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 받아 90년 3월 이미 나는 PC위크의 일본 판권을 확보한
                      터였다. 나는 감히 지프 데이비스의 핵심인 출판부문을 사기
                      로 했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주거래처인 고교은행은 물론
                      일본의 어떤 금융사도 융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
                      에서 팀을 짜기로 했다.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프라이스 워
                      터하우스 쿠퍼스를 회계 감사로 기용했다. 이들은 내 무모한
                      계획을 비웃지 않았다. 신용 담보 융자인 LBO(Leveraged
                      buyout) 방식을 제안했다. 소프트뱅크와 지프 데이비스의 수
                      익을 합하면 '1+1=2'가 아닌 '1+1=3'의 신용도를 갖출 수 있
                      다는 거였다. 모건스탠리의 주선으로 뱅크 오브 뉴욕·씨티은
                      행·체이스맨해튼은행 관계자들과 저녁을 했다. 일주일 뒤 세
                      곳 모두에서 OK 사인이 왔다.
                       94년 10월 말 나는 자신만만하게 입찰일을 맞았다. 한데
                      정오쯤 믿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투자전문사 포스트먼 리틀
                      이 단독 교섭권을 얻어 출판부문을 인수해버렸다는 거였다.
                      단독 교섭권이란 입찰 전 파격 조건을 제시해 받아들여질 경
                      우 전액 현금을 지불하고 회사를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
                      다는 루머를 듣고 거래를 조기에 타결해버린 거였다.
                       나는 우선 팀을 다독였다. "미국식 M & A를 제대로 배웠
                      다" "과정 습득 자체가 재산"이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하지
                      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상황이었다.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얼마나 잤을까. 불현듯 눈을 떴
                      다. 오후 4시55분. 입찰 마감까지 딱 5분이 남은 상태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번쩍 했다.
                       '지프 데이비스엔 출판부문 말고 전시회부문인 '인터롭'도 있
                      지 않나. 인터롭은 컴덱스에 이은 미국 2위 전시회다. 그걸
                      사자!'
 나는 곧바로 모건스탠리에 전화했다.
 "지금 바로 지프 데이비스에 연락해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게. 인터롭을 살 테니 입찰액 계산을
위해 자정까지 마감을 미뤄달라고 말이야."


 컴덱스를 곧 인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더해 인터롭까지 사면 미국 IT전시 시장의
70~80%를 잡게 된다. 나는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날 자정 인터롭 인수를 확정했다.
값은 2억 달러. 나는 모건스탠리에 10억 엔이 넘는 고문료를 기꺼이 지불했다.


#'5분 독대'로 끝낸 3조원 빅딜


 다음해 초엔 컴덱스 인수에 나섰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본사로 가


아델슨 회장 회장과 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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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고 싶은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타당한 수준이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
상치를 벗어난 값이면 미련 없이 물러나겠어요."


 나는 이어 "더 높은 값을 쳐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꿈을 존중하고 더 큰
성취를 이룰 사람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아델슨 회장이 값을 불렀다.


 "8억 달러."


 나는 말없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협상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컴덱스 측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빌 게이츠, 에커드 파이퍼 컴팩 회장 같은
거물들과 막역한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스코 본사의 사외이사이기도 했다. 회사 인수 뒤 나
는 기존 멤버를 한 명도 교체하지 않았다.


 얼마 뒤엔 기어코 지프 데이비스 출판부문마저 가져왔다. 포스트먼 리틀의 테드 포스트먼 회
장과 역시 '단판 승부'를 벌였다. 그는 21억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95년
당시 소프트뱅크의 매출은 600억 엔이 좀 넘었다. 그런 회사가 1년6개월 새 무려 3100엔 규모
의 국제적 M & A를 성사시킨 것이다.


 혹자는 이처럼 전광석화 같은 빅 딜에 아연실색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즉흥적인 결정
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는 M & A 전 온갖 데이터를 동원해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계
산한다.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수치(數値) 매니지먼트'와 '압도적 속도'
는 소프트뱅크 DNA의 원형질이다.


◆소프트뱅크식 팀제=
전사 조직을 9명 이하 팀으로 나눈 것. 경영학에서 말하는 관리자 1인의 통제 범위가 5~9명임
을 감안했다. 또 팀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회사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에 준해 판단할 수 있음
을 고려했다. 이 회사 팀장은 권한이 크다. 사장이나 본사가 모든 권한을 갖는 건 1000m 떨어
진 곳에서 권총으로 목표물을 맞히려는 것과 같다고 봐서다. 반면 현장 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
면 1m 앞에 서서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재량권이 큰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팀별 독립채산
제 형태로 운영해 실적이 부진할 경우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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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06




지난해 1월 손정의 회장이 중국 최대 인터넷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 창업자 잭 마와 일본 도
쿄의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2000년 1월 이후 알리바바에 8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 33.3%를 획득했다. 알리바바의 현재 시가총액은 나스닥 기준으로 191억 달러에 이
른다. 잭 마는 최근 "야후의 인수에 관심 있다"는 의사를 밝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블룸버그]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
합병(M & 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
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
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
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
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
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
                      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
                      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
                      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
                      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
                      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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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
                      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
                      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
                      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
                      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
                      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
                      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
                      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
                      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
                      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
                      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
                      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
                      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
                      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
                      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
                      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
                      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
                      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
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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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
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
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
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
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
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 & 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
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
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
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
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
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
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
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야후(Yahoo!)=
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
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
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
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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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2011-10-11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
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
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
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
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
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
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
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
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
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
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
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
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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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
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
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
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
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
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
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
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
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
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
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
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
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
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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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13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
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
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
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
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
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
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
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
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
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
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
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
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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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
다. 나는 선언했다.



 "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
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
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
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
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
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
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
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
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
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
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 31 -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
                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
                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
                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
                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
                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
                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
                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손정의의 '늑대론'
=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
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
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ADSL과 ISDN
=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
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
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
았다"고 했다.




                          -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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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앙일보 연재 손정의 회장의 삶과 경영 자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이디어 짜내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⑦ 주식 상장 성공 ⑧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⑫ “내가 3시에 보자고 하면 그건 새벽일 수도 오후일 수도 있었다”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⑭ “회사 살 수 있을까” 대신 “협력할 수 있을까”를 묻다 ⑮ 트위터에서 내 별명은 ‘야리마쇼(やりましょう·합시다) (16) 30년 300년 비전을 가져라 (17) 60대 목표 ‘회사 물려주기’ 이미 시작 (18)·끝 “내 기업만 잘 꾸린다? 그것만으론 안 되는 일도 있다” - 1 -
  • 2.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내 꿈은 료마가 키웠다 일본 IT 신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도전 40년 ‘뜻을 높게!’ 삶과 경영 연재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6 손정의 회장은 일본 정보통신기술(ICT)계의 료마로 불린다. 19세기 료마가 신사상신문물 의 물꼬를 텄듯, 20세기 손 회장은 일본에 디지털 혁명의 불을 지폈다.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손정의(54) 소프트뱅크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일본 4위 부자. 연매출 3조 엔(약 43조원)의 아시아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ICT 업계 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 불린다. 료마는 메이지(明治) 유신의 초석을 놓은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자 손 회장의 롤모델이다. 손 회장은 "내 거대한 꿈과 무모한 도전은 모두 그에게서 배 운 것"이라고 전했다. 본지는 손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연재한다. 그는 이를 기념해 직접 쓴 좌 우명(志高く)을 보내왔다. '뜻(志)을 높게!'라는 의미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한 남자를 만났다. 내 인생의 좌표가 된 인물, 사카모토 료마다. 어느 날, 과외 선생님이 생소한 작품 한 편을 권해 줬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쓴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였다. 정신이 번쩍 났다. 소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는 최하급 무사로 태 어났으나 강력한 의지와 비전으로 일본 근대화를 이끈 개혁가이자 탁 월한 비즈니스맨이다. 그 삶에 비춰 보니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 다. 차별이니 인종이니,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자체가 얼마나 시시한 지 깨달았다. 한 번뿐인 인생을 이렇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 건가!  난 다르게 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때까지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뭔가 큰일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 인생을 불사를 만한 일에 이 한 몸 부 서져라 빠져들고 싶다 '는 결심만큼은 가슴 깊이 강렬하게 자리 잡았다. 나나 내 가족의 사리사 욕이 아닌, 수천만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뭔가 큰일. 금전욕 따위가 아니다. 많은 이가 "그 사람 이 있어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값진 일을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열여섯 소년 이 품은 삶의 포부였다. 좌우명 '뜻을 높게!'는 그렇게 내 인생의 중심이 됐다. - 2 -
  • 3. ▶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① 번지수도 없는 판잣집 … 열여섯에 뜻을 품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 쓰러진 아버지를 뒤로 하고 미국 유학길 올랐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5 손정의 회장은 미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학비 마련을 위해 발명에 몰두했다. 왼쪽 사진은 손 회장(가운데)과 그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데 발벗고 나선 공대 연구원들. [소프트 뱅크 제공] 석 달 전, 정말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청와대를 방문했고 기자 간담회도 열었다. 나로서는 한 국에서 10년 만에 치른 공식 행사였다. 자리가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물었다.  "좌우명이 '뜻을 높게!'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고민이 참 많습니다. 이들이 뜻 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꾸물대지 않고 답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라면 마음속에 늘 답을 품고 살아온 때문이 다.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어떤 꿈이든 펼칠 수 있지요. 차나 집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 을 위한 꿈을 꾸세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고민할 때 세상을 바꾸고 본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말이다. 한데 난 정말 그런 생각으로 힘껏 살아 왔다. 방 향을 확정한 건 열아홉 살 때이지만 씨가 싹튼 건 열여섯 살 적이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한 여성이 있다. 내 할머니다. - 3 -
  • 4. # 돼지 치는 집 아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소년 손정의. [소프트뱅크 제공]  할머니는 열네 살 때 일본으로 왔다. 그 나이에 결혼도 했다. 상대는 무려 37세, 내 할아버지 다. 대구 태생인 할아버지 역시 열여덟 적에 현해탄을 건넜다. 할머니는 일본 땅에서 제2차 세 계대전을 겪었다. 진흙물로 아이들과 허기를 달래는 처절한 나날이었다. 열네 살이라니, 아직 어 린애 아닌가. 그 나이에 친척 하나 없는 타향으로 홀로 시집 온 것이다. 할머니는 조선 국적에 일본말도 서툴렀다. 얼마나 막막했을까. 우리 아버지도 중학생 때부터 생업에 나섰다. 7형제 중 하나로 태어나 참 열심히 일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1957년 8월이다.  당시는 그나마 형편이 좀 나아진 때였단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지만 집도 있었다. 규슈 사가현의 한인 집성촌에 살았다. 내 호적의 본적지 칸에는 '사가현 도수시 고켄도로 무번지 (無番地)'라고 써 있다. 번지가 없으면 적지를 말지 굳이 무번지라고 할 건 또 뭔가. 제 땅이 아 니라 국철 선로 옆 공터에다 양철지붕을 올리고 판자를 둘러쳐 살았으니 정식으로 호적을 인정 해 줄 수 없었던 거다.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사형제 중 둘째인 나는 온전히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가 날 예뻐해 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할머니가 "마사요시, 나갈 시간이데이-" 하 면 겨우 서너 살인 나는 얼른 리어카에 올라타 떨어지지 않으려 꽉 매달렸다. 리어카는 까만색 이었고 몹시 미끈거렸다. 반으로 자른 드럼통 서너 개가 실려 있었다. 음식 찌꺼기를 담는 통이 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역전 식당에서 먹고 남은 음식을 얻어 와 돼지를 쳤다. 어린 내가 뭘 알 겠는가. 난 그저 리어카 타고 나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다. '아, 수레가 미끈둥대고 시큼한 내가 좀 나는구나. 바퀴가 웅덩이에라도 빠지면 꼼짝없이 미끄러지겠구나. 떨어지면 죽겠다'. 그런 생 각으로 할머니가 "꼭 잡으래이-" 하실 때마다 리어카에 몸을 찰싹 붙이곤 했다.  그렇게 좋아한 할머니를 철이 들면서 죽도록 싫어하게 됐다. 할머니는 곧 '김치'였기 때문이다. 김치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그 사실과 관련된 온갖, 내 삶을 고통으로 채웠던 것들. 숨을 죽여 가며, '야스모토 마사요시(安本正義·어린 시절 손 회장의 일본식 성명)'란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나날. 재일동포임을 감춰야 한다는 사실이 내겐 더더욱 콤플렉스였다. 할머니가 너무 싫었 다. 일부러 피해 다녔다. - 4 -
  • 5.  '차별'에 대해 보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 건 어린 시절 한때 품은 꿈 때문이었다. 난 초등학 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미카미 다카시라는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영향이 컸다. 꿈을 밝히 자마자 아버지는 재일교포로선 교육공무원도 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대뜸 "그럼 귀화시켜 달라 "고 했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초등학교 교사도 훌륭한 직업이지만 넌 그보다 더 크게 될 수 있 다. 다른 쪽으로 소질을 키워 보자"며 나를 달랬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나는 아버지와 말을 끊었 다. 고민 끝에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 유의 일, 그보다 좀 가볍거나 혹은 심각한 아픔과 딜레마가 도처에서 출몰했다. # 아버지 가게 살린 열두 살 고집  꿈 많은 소년이던 나는 그 외에도 화가·시인·정치가·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으로 말하 자면 지금도 가끔 회의 중 화이트보드에 톰과 제리, 스누피 같은 만화 캐릭터들을 그리곤 한다. 남들이 제법 그럴듯하다고들 한다. 정치가가 되고 싶은 건 차별받는 재일교포 3세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져 봤음직한 생각이다. 시인이란 직업도 아주 그럴듯하게 여겨졌 다.  그래도 그중 가장 현실적인 꿈은 역시 사업가가 되는 거였다. 나름대로 자질을 보이기도 했 다. 열두 살 때 일이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제법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몸을 아끼 지 않고 일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저런 장사에 손을 댔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작은 카페 를 열었다. 한데 어린 내 눈에도 도무지 승산이 없어 보였다. 전철역에서 먼 데다 번화가도 아 니었다. 커피 원료를 공급하는 회사마저 물건을 대길 꺼렸다. 장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 것 이다. 내가 꾀를 냈다. 아버지에게 "공짜 쿠폰을 잔뜩 찍어 역 앞에 뿌리자"고 했다. 아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 꺼내지도 마라"고 했다. 하지만 내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0장을 찍어 나눠줬다. 커피공급업자를 초대한 날, 덕분에 카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놀란 공급업자들은 아주 싼값에, 좋은 결제 조건으로 물건을 대주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은 많이 들었 으나 얼마 안 가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다. 가게는 갈수록 번창해 몇 년 뒤 상당히 높은 값에 매각했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다. 가족의 위기였다. 한 살 위 형은 장남의 책임을 다하려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집안의 생계를 책임 지고 아버지 병원비를 댔다. 집안의 쇠락을 목도하며 내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여기 서 빠져나가리라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 사카모토 료마를 만난 것이다. # 사카모토 료마, 가슴에 불을 지피다  마음을 먹었으면 실천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큰 일을 하자. 일본 제1의 사업가가 되자. 나는 단단히 결심했다. 가족의 어려움을 중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더불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이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건 말 하자면 료마의 '탈번' 같은 행동이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경이적 시청률을 기록한 NHK 드라마 ' 료마전'에도 이를 묘사한 장면이 나온다. 료마는 탈번을 고민한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려워 실행하지 못한다. 이때 료마의 누이가 말한다. - 5 -
  • 6.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거라. 그걸 위해서 라면 우리는 괜찮다. 떠나라!"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눈물이 쏟아져 애를 먹었다. 내가 그토록 하염없이 운 건 그 스 토리에 내 지난날이 겹쳐 떠오른 때문이다. ◆손정의와 소프트뱅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 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다. 미국 UC 버클리대 경제학과 졸업 뒤 1981년 일본에서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95년엔 세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8억 달러에 인수한다. 이를 인연으로 야후에 투자한 뒤 96년엔 일본에 야후 재팬을 설립해 인터넷 열풍을 주도했다. 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 ◆탈번(脫藩)= 에도 시대 일본의 무사가 소속된 지역인 번을 떠나는 행위를 말한다. 번주(주군) 를 배신한 것으로 간주돼 본인이 중벌을 받음은 물론 가족에까지 해가 미쳤다 - 6 -
  • 7.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미국 큰 땅서 큰 사업가 되겠다” … 고교 자퇴, 퇴로 끊어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6 ② "인간은 같다는 걸 증명해낼 것" … 가족·친척·선생님 결국 설득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 여름, 나는 한 달간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눈이 트였다고 할 까. 당시 미국은 정말 크고, 힘이 넘치고, 세계에서 문명이 가장 발달한, 한마디로 빛이 나는 나 라였다. 료마는 말했었다. "바다 건너 외국에 가 보고 싶다. 미국에 가 보고 싶다. 유럽을 보고 싶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어떻게든 가보고 싶어 한 곳에 내가 간 거다. 실제로 보니 얼마나 놀랍던지,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나서 나는 한동안 흥분해 어쩔 줄 몰랐다. 큰 사업가가 되기로 한 이상 난 그 땅에 가야 했다. 사업을 일으킬 뭔가를 찾아와야 했 다. #"10년 뒤를 위해 … 이 맘은 안 바뀝니다"  예상대로 주변의 반대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입원 중이었다. 가정 경제는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붙였다.  "인정머리 없는 녀석! 아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마당에 유학이라고? 네 한 놈 잘되자고 가 족을 내팽개치냐? 피도 눈물도 없는 놈!"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국적이니 인종이니, 세상엔 고민만 하는 이들이 널렸지만 난 실제 일본 제 일의 사업가가 돼 보이겠어요.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이름으로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어요!"  어머니는 매일 눈물바람이었다. 할머니도 울며 불며 매달리셨다.  "가지 마라, 마사요시. 거기가 어디라고…. 한 번 가면 못 돌아온다, 가지 마라!"  어머니에게도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버지는 안 죽는대요. 피를 토하기는 했지만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앞으로 몇 년, 집안을 생각하면 여기서 착실히 공부해야겠지요. 하지만 몇십 년을 생각하면 가족 을 위해서도, 또 제 자신이 뭔가 이루기 위해서라도 인생을 바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전 떠날 거예요. 이 맘은 절대 안 바뀝니다."  학교에도 직접 자퇴서를 냈다. 마침 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참이라 선생님들의 반대가 컸 다. 정 갈 거면 휴학을 해라, 자퇴까지 할 게 뭐냐는 설득을 거듭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생님, 전 유약한 남잡니다. 미국에 간다지만 영어를 못 해요.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곤란이 닥치면 좌절하고 마음이 흔들릴 텐데, 그때 돌아올 곳이 있으면 바로 포기할지도 몰라요. 퇴로를 끊지 않으면 어찌 고난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모두 내게 졌다. 가족과 친지들은 십시일반, 최소한의 학비와 생활비를 모아줬다. #할머니 손 잡고 헐벗은 모국으로  미국행이 결정된 뒤 나는 할머니와 마주앉았다.  "할머니, 절 끔찍이 아끼시는 줄 잘 알면서 꼴도 보기 싫다고 한 걸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한 국에 데려가 주세요. 미국으로 가기 전 제가 그토록 싫어했던 조상의 나라,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 7 -
  • 8.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되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더없이 기뻐했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한국에 갔다. 2주 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조부모님의 고향은 전기도 안 들 어오는 대구 인근의 시골 마을이었다. 내놓을 것이라곤 사과밖에 없는 동네. 그마저도 땅이 척박 해서인지 알이 조그마했다. 저녁이면 우리는 촛불 침침한 친척집 안방에서 상을 받았다. 소박하 지만 정성 가득한 차림이었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가져온 헌 옷가지들을 내놨다. 팔꿈치가 닳은 스웨터, 기운 자국이 있는 바지. 그런 것들을 마을 사람들은 한껏 기뻐하며 받아주었다. 그 모습 을 보는 할머니 얼굴에도 함박 웃음이 피어났다. 이전부터 할머니는 늘 말했었다.  "우리가 이만치나 사는 건 다 다른 사람들 덕분이데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 때에도 도와 주는 분들이 꼭 있었으이까네. 그라이, 절대 남을 원망하믄 안 된데이. 모두 남들 덕분인 기라."  그런 말씀들, 또 평생 처음 찾은 모국에서 할머니가 보여준 미소와 행동은 내게 큰 영감을 줬 다. 뭔가 큰일, 다른 이들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상대가 몰라도 좋다. 그저 누군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느 끼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당시 깨달음은 내가 몇 년 뒤 '정보기술(IT)로 인간을 행복하게!'라는 소 프트뱅크의 창립 이념을 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본 땅에 산다고 왜 성을 바꿔야 하나"  잠시 딴 얘기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종종 "모국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묻는다. 1999년 한국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한 기자가 비슷한 질문을 했다. "마음의 고향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제 마음의 고향은 인터넷입니다."  상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비록 일본에 귀화했지만 내가 '손(孫)'이라는 한국 성을 고수하 기 위해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아는 듯했다. 당연히 "한국"이라거나 "모국"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으리라. 한데 내가 '손씨'를 고집한 건 꼭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니었 다. 그건 내 '자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20년 넘게 '손정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단지 내 신체가 속한 국가가 일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그걸 바꿔야 하는가.  난 어디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고, 묻히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할아버지 의 고향, 내 존재의 뿌리.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은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의 생 활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 ◆손정의 부친의 교육열=손정의 회장의 부친인 손삼헌씨는 교육열이 높았다. 손 회장이 중학교 에 입학하자 대도시인 후쿠오카로 이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회장은 그곳에서 명문고 진학 률이 높은 조난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지역 명문인 구루메대학 부설고에 합격해 가족을 기쁘게 했다. - 8 -
  • 9.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③ “변명 따위 않겠어 … 목숨 걸고 공부한다”“어떻게 온 미국인데” … 2주 만에 고교 3년 뗐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17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6월 나란히 방한한 손정의 회장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한국이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는 김대중 대통령의 물음에 손 회장은 "첫째도, 둘째, 셋째도 브로드밴드(초고속인터넷)"라고 답했다. 게이츠 창업 자 역시 "정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2000년대 한국이 인터넷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엔 이들의 만남이 있었다. [중앙포토] 1974년 초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57년 8월생인 나는 아직 만 16세였다. 홈스테이를 하며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았다. 그해 여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세라몬테고등학교 10학년 으로 편입했다. 10학년은 한국 학제로 치면 고교 1학년에 해당한 다.  내 마음은 급했다. 정말 어렵게, 무리해서 추진한 유학이다. 어떻게든 빨리 대학에 가 치열하 게 공부하고 싶었다. 일주일간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읽었 다. 물론 다 이해한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영어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핵심과 맥락은 파악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다. 한데 선생님은 의외로 선선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줬다. 11학년 교과서 를 모두 구했다. 이어 사흘간 전체를 섭렵했다. 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3일 뒤, 교장선생님께 선언했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  이번엔 선생님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 봐라"고 했다. 속으론 아마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나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 이 너무 많았다. 손을 번쩍 들고 감독관에게 말했다.  "전 일본에서 왔습니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 - 9 -
  • 10. 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이 돌아와 말했다.  "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  원래 시험은 오후 5시에 끝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내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다시 손 을 들었다.  "사전을 찾아야 해 시간이 배로 필요합니다. 종료 시간을 늦춰주십시오."  이번에도 감독관이 졌다. 나는 자정까지 시험을 쳤다. 그리고 합격했다. 미국에 온 지 1년도 안 돼 고교과정을 마친 것이다. # 19세, 인생 50년 계획을 세우다 하지만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다. 고교 졸업 때까지도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 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다.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다.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다. 덕분 에 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대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19세. 나는 웅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름하여 '손정의 인생 50년 계획'이다. 20대부터 60대까지, 앞으로 50년 동안 내가 도전할 것들, 이뤄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전을 완성한 것이다. 이후 내 삶은 온전히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바쳐졌다. 계획을 바꾼 적도, 목표치를 낮춘 적도, 이를 달성하지 못한 적도 없다.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 이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원칙이다. - 10 -
  • 11. # 우연히 본 사진 … 감격해 울었다 인텔의 1974년 작 마이크로프로세서 8080.  대학에 입학한 뒤엔 정말 죽기살기로 공부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업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항상 맨 앞줄에 앉아 교수 얼굴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화장 실에 갈 때도 교과서를 손에 들고,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에서 교과서를 놓지 않았다. 왼손엔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움직이며 눈은 교과서에 못 밖은 채 아무 것 이나 짚이는 대로 입에 넣었다.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두 눈으로 음식을 내려다보며 여 유 있게 식사하는 사치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폐렴에 걸린 줄도 몰랐다. 기침이 계속 터져 나오고 목에선 쌕쌕 소리가 났지만 참고 공부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그저 책만 봤다. 쉬 는 시간은 오직 잠 잘 때뿐. 그마저도 최소화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영어가 잘 안 된다, 돈이 없다, 그런 자기 위안 따위 허락할 수 없 었다. 피 토하는 아버지, 오열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온 유학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왜 우는 소리를 낸단 말인가. 물론 일본에 있을 땐 나도 불평 많은 학생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선 그럴 수 없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다. 본업 중의 본업에 목숨을 걸자. 죽어라 공부하지 않 으면 벌 받을 거야!' 그런 각오로 나 자신을 몰아쳤다.  그 무렵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충격적 사건을 접했다. '일렉트로닉스'라는 과학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무슨 미래도시의 설계도 같은 컬러 사진이었다. '이게 뭐지? 희한하게 생겼 네?' 다음 페이지를 보고서야 알았다. 인텔이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손가락 발가락까지 온몸이 마구 저렸다. '인류가 드디어 이 런 엄청난 일까지 해냈구나.' 굉장한 감격을 느꼈다. 이 작은 부품 하나가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갈지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 발명이다. 컴퓨터다. 그 길을 가겠다.' 소프트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 11 -
  • 12.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④ 매일 5분 발명 … 1억 엔짜리 아 이디어 짜내 열아홉 살 대학생 사업가, 교수·기업을 설득하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0 열아홉 살, 어렵게 들어간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편으로 발명에 몰두 했다. 잡지에서 우연히 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사진과 기사에 완전히 매료됐기 때문이다. 사진을 오려 매일 들고 다녔다. 잘 때는 베개 밑에 넣어두기까지 했다.  '이 작은 칩 하나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나도 여기, 컴퓨터에 걸겠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집에선 내 유학자금으로 학비를 포 함해 매달 평균 20만 엔가량의 돈을 보내주었다. 아버지가 쓰러진 상황에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매일 5분을 발명에 할애하기로 했다. 5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걷고 밥 먹을 때조차 책을 볼 만큼 목숨 걸고 공부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하루 한 가지씩을 고안한 뒤 그중 가장 가능성 높은 것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한 1000만 엔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 대범한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비현실적이 다" "차라리 학교 앞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난 흔들리지 않았다.  '마쓰시타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창업자도 작은 발명을 토대로 회사를 일으켰다. 나라고 못 할 리 없어. 반드시 할 수 있다.'   #공대 교수에게 "당신을 고용하겠다"  정말 매일 하나씩 뭔가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 가지 접근법을 택했 다. 첫째, 주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는다. 둘째,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둥근 것을 네모난 것으로 바꿔보는 식의 변환을 시도한다. 셋째,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해본다. 그러기 를 100일, 150일…. 대부분 시시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하나, 말이 될 법한 것이 있었다. 음성발 신기와 사전, 액정화면을 결합한 제품. 다중어 번역기였다.  나는 경제학도다. 엔지니어링 지식이 부족하다. 시간도 없다. 나는 아이디어를 면밀히 다듬은 뒤 다짜고짜 공대의 포레스터 모더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음성 발신 기술의 권위자였다.  "선생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근사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절 위해 팀을 꾸려 이 제품을 만들어주세요. 당신을 고용하겠습니다."  모더 교수는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상 같은 건 싫어하니까 일당은 선생님께서 정하세요. 특허가 팔리면 바로 정산해 드리겠습 니다. 물론 제품 개발에 실패하면 선생님 몫도 없습니다. 공짜로 일한 게 되는 거죠. 이런 조건, 어떠십니까?"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얘기지만 어디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곧 내 아이디어를 현 실화하기 위한 팀이 꾸려졌다. 이들은 내게 매일 "헤이, 보스. 오늘은 뭘 하지?" 하고 묻곤 했 다. 나도 가능한 모든 시간을 짜내 개발에 매달렸다. 내가 유독 관심을 쏟은 건 '사용자 시각'이 었다. 나 자신 영어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사전만 찾아선 정확한 영어 발음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을 발명과 연결시킨 게 바로 번역기 아이디어였다. 그런 만큼 '기술적으로 얼마나 뛰 어나냐'가 아닌 '사용하기에 얼마나 편리하냐'에 초점을 맞췄다. 1977년 특허를 땄고, 이듬해 시 제품을 완성했다. 가장 친한 친구인 홍루(중국 이름 루훙량)와 '유니손 월드'라는 벤처기업도 차 - 12 -
  • 13. 렸다. 78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다. 특허를 팔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 대박을 치다  먼저 오사카에 있는 마쓰시타전기를 찾았다. 마쓰시타 측은 "이미 제품을 개발 중이다. 관련 특허도 있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산요전기도 방문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수십 개 회사를 전전했다. 샤프 본사를 찾았을 때 우연히 미국에서 안면을 튼 사사키 다다시 중 앙연구소장을 만났다. 사사키 소장은 내 열정을 높이 샀다. 시제품에도 큰 흥미를 보였다. 마침 일본·미국·영국의 여러 회사가 다국어 번역기 개발에 착수한 상황이었다. 사사키 소장은 선뜻 2000만 엔을 내놨다.  "이건 일·영 번역기 기술에 대한 개발비입니다.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그렇게 주 요 언어에 대한 기술을 개발할 때마다 이만큼씩 더 내놓겠습니다.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해 주십 시오."  그렇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샤프에 넘긴 특허는 79년 이 회사가 출시한 전자사전 'IQ3000'의 기반 기술이 됐다.  이를 포함해 나는 모더 교수 팀과 한 프로젝트를 통해 최종적으로 1억 엔(현재 환율로 약 15 억원) 이상을 벌었다. 애초 목표였던 1000만 엔의 10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것도 지금으로부 터 30여 년 전에 말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일본의 중고 게임기를 수입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카페 등지에 이 기기를 설치한 뒤 위탁 운영을 했다. 이 사업과 기타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다시 1억5000만 엔 이상의 수익을 거뒀다. 모두가 비웃던 발명을 통해 학비, 생활비는 물론 사업 밑천까지 마련한 것이다. #결혼식 지각, 증인도 급조  스물한 살, 나는 번역기 개발 이상으로 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결혼이다. 상대는 미국에 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일본인 유학생 유미. 너무 바빠 도서관에서 짬짬이 얼굴을 보는 게 다였 지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내 아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운 뒤 흥분한 나머지 일장연설을 한 것도 그녀 앞에서였다.  나는 유미와 미국에서 약식으로 혼례를 치렀다. 주례와 증인만 입회한 가운데 간단한 절차만 밟았다. 처음 잡은 날 번역기 개발에 몰두하느라 그만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주례가 화를 내며 가버려 새로 날을 택해야 했다. 두 번째로 잡은 날에도 결국 지각을 했지만 다행히 주례가 기다려줘 식을 마칠 수 있었다. 증인 섭외를 깜빡하는 바람에 교회 문지기에게 통사정을 하기도 했다.  80년. 마침내 학교를 마친 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요즘도 그렇지만 미국에서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원에 진학한다. 나 역시 모교인 UC버클리는 물론 하버드·스탠 퍼드·MIT 같은 학교들로부터 전액 장학생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미련 없이 귀국 비행기에 올 랐다. 대학만 졸업하면 돌아가겠다고 했던,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마이크로프로세서(microprocessor)=컴퓨터 시스템의 중앙처리장치(CPU) 기능을 대규모 집적 회로 칩에 탑재한 것. 인텔이 1971년 개발한 i4004가 효시다. 이로부터 컴퓨터의 대중화·소형 화 시대가 열렸다. 손정의 발명법 ① 주변 문제를 해결하는 답 찾아라 ② 큰 것은 작게, 네모는 둥글게 변환 ③ 기존의 것을 새롭게 조합하라 - 13 -
  • 14.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⑤ “오를 산을 정하라, 인생의 반이 결정된다”직원 2명 앞에서 “30년 뒤 1조엔 매출” 연설했더니 … 두달 뒤 “미친 놈”하 며 떠나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2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 손정의 회장이 임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직원 두 명으로 시작한 소프 트뱅크는 한때 부도위기까지 몰렸다가 손 회장의 도박과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기사회생했다. 첫 고객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직원수가 15명으로 늘었고, 또 한 달 뒤에는 100명 규모의 회사 가 됐다. 1년 뒤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매스컴은 손 회장 에게 '괴물 실업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소프트뱅크 제공] 1980년 3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현지에서 운영하던 소프트웨어(SW) 업체 '유니슨 월 드'는 친구이자 동업자인 홍 루에게 넘겼다. 그는 훗날 중국의 대표적 통신기기 제조업체인 UT 스타컴을 창업했다. 귀국 뒤 1년6개월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 였으리라. 친척들은 수군거렸다. "마사요시가 미국에서 뭘 배워왔다는 거야?" 정작 내 머리와 가 슴속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부모가 시켜서, 갑작스러운 인연으로, 돈 이나 벌겠다는 욕심에 뭔가를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길을 한번 정하면 바꾸기 힘들다. 우왕좌왕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오르고 싶은 산을 정하라. 그러면 인생의 반은 결정된다'. 이 한 생각을 돛대 삼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내 꿈은 사업가다.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이 뭘까. 남이 안 하는 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 누 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 최고가 될 수 있는 일. 또한 절로 열의가 샘솟으며,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고, 기술 혁신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야여야 했다. 결론은 '디지털 정보혁명'. 그것으로 세 상의 지혜와 지식을 공유케 해 인류에 공헌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 스물세 살 청년이 마침내 찾은 큰 뜻이었다. # 디지털혁명의 도구, 소프트웨어 유통   누군가는 허황되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물론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가는 것도 좋다. 세 상 99%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나 정말 큰 꿈, 원대한 포부를 품 고 있다면 접근방식부터 달라야 한다. 먼저 큰 비전을 세운 뒤 그 실현을 위한 시간표를 미래에 - 14 -
  • 15. 서부터 현재를 향해 거꾸로 돌린다. 오늘 아닌 내일의 트렌드를 파악하고, 대기업 못지않은 배포로 승부하며, 그에 걸맞은 투명성과 경영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 어 쨌거나 난 자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혁명 의 도구'로 택한 건 SW 유통. 치밀한 분석의 결과였다.  창업 전 나는 40여 개의 아이템을 검토했다. 80년대 초 일본은 PC 대중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PC 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우수한 SW가 있어야 한다. 미래는 SW 세상이 될 게 분명했다. 직접 SW 개발에 뛰어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승률이 너무 낮았다. 운 영체제(OS) 분야는 세계 표준을 주도하는 미국 기업이 선점해 버렸다. 남은 건 응용 SW 분야인데, 이건 마치 모든 신곡이 히트칠 수 없듯 톱10 안에 들어가는 것만 대박을 치는 구조였다. 그래서 난 개별 상품 대신 인프 라를 택하기로 했다. 이익은 적을지 모르나 생명력은 확 실히 길다. 또한 압도적 지위를 획득할 경우 업계 성장 에 정비례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승률 70%. 나는 100여 개의 경영 포인트를 검토한 뒤 그렇게 결론 내렸 다. # 선풍기는 도는데, 직원은 둘뿐인데   81년 9월, 고향 가까운 후쿠오카현 오도시로시에서 소프트뱅크를 창업했다. 에어컨도 없는 허름한 건물 2층. 직원 두 명을 구했다. 첫날 그들을 앞 에 놓고 귤 상자에 올라 한 시간가량 열변을 토했다. 곁에선 낡은 선풍기가 윙윙 돌았다.  "우리 회사는 세계 디지털 혁명을 이끌 거다. 30년 후엔 두부가게에서 두부를 세듯 매출을 1 조(엔), 2조(엔) 단위로 세게 될 거다. 사업을 하겠다는 자가 1000억이니 5000억이니 하는 걸 숫자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두부가게 운운한 건 일본에서는 두부 한 모를 '1조'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고 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둘 다 완전히 기가 질린 듯했다. 그들은 결국 두 달을 못 채우고 나가버 렸다. "저 인간 제정신이야?" "미친 놈!" 하면서.  그렇게 파리만 날리고 있을 때 샤프사의 사사키 다다시 전무가 소중한 조언을 해주었다. "SW 사업은 정보 밀도가 높은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년 전 내가 미국에서 발명한 다 국어 번역기 기술을 거액에 선뜻 구매해 준 이였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도쿄 고지마치 4 번가에 있는 ㈜경영종합연구소의 방 한 칸을 빌렸다. 이어 연구소의 노다 가즈오 회장을 찾았 다. 명함을 건네며 "손 마사요시입니다. 재일 한국인입니다"하고 인사했다. 나는 미국 유학 이후 '야스모토'란 일본식 가짜 성(姓) 대신 진짜 성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노다 회장은 내 구상을 듣 - 15 -
  • 16. 더니 "장래성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이론을 일본에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런 인물이 격려해 주다니, 뛸 듯이 기뻤다. 이후 그는 사사키 전무와 함께 경험 없고 인맥 부족한 나의 귀한 멘토가 돼주었다. # '괴물 실업가' 태어나다  도쿄로 옮긴 얼마 뒤 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창업자금 1000만 엔 중 800만 엔 을 털어 전자전시회인 '일렉트로닉쇼'에 참가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뜯어말렸다. 회사라 곤 달랑 이름뿐, 제품도 실적도 없었다. 난 못 들은 척 행사장에서 가장 큰 부스를 빌렸다. 거길 화려하게 꾸민 뒤 부스 없는 SW업체들에 무료로 대여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 광고 효과가 크 리라 봤다. 'PC 시대엔 SW가 중요하다, 그 SW를 나 손정의가 판매한다'는 사실을 열심히 알렸 다. 흔한 카탈로그 대신 아예 잡지를 만들어 돌렸다. 전시회가 끝나자 회사는 파산 지경이 됐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조신전기입니다. 일렉트로닉쇼에서 귀사의 부스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오사카에 일본 최대 컴퓨터 매장을 내는데 거기에서 쓸 SW를 납품해 주시겠습니까."  일면식도 없는 회사였다. 유통업은 신뢰가 중요한데, 거래 실적 하나 없는 우리를 믿고 연락 해 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도 없었다. 물건을 떼 오려면 큰돈이 필요하다. 소프트뱅 크는 당시 무일푼이었다. 나는 조신전기 사장을 찾아갔다. 내 비전과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선수 금을 청했다. 그 의지, 열정이 통한 걸까. 상대는 쾌히 지원을 약속했다. 사사키 전무의 도움도 컸다. 그가 집까지 담보로 넣어가며 보증을 선 덕분에 다이이치칸교은행으로부터 무려 1억 엔을 빌릴 수 있었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갔다. 5000만 엔을 들여 일본 최대 SW업체이던 허드슨과 독점 판매 계약 을 맺은 것이다. 유통의 힘은 제품 수급력에서 나온다. 당장은 5000만 엔이 큰돈이지만 그 투자 로 인해 더 큰 기회가 올 것을 확신했다.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첫 매출을 올린 지 1년 만에 소 프트뱅크는 매출 35억 엔의 중견 기업이 됐다. 83년 '주간 아사히'는 나를 '괴물 실업가'로 소개 했다. '컴퓨터로 거부를 쌓은 신데렐라 보이'. 난 신이 났다. 곧 닥쳐올 불행은 꿈에도 모른 채. ◆100번의 노크(100 Knocks)= 손정의 회장이 창업 전부터 구상한 경영 진단 시스템. 특정 사업에 대한 100가지 지표를 그래프 화해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검토 항목을 1만 개까지 늘릴 수 있다. "무엇이든 골이 빠개지게 생각한다"는 손 회장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16 -
  • 17.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⑥ 병상에서 다시 만난 료마 [중앙일보] 2011.09.27 스물여섯에 5년 시한부 절망 … 책 4000권에서 평생 먹고살 25자를 건지다 소프트뱅크 창업 초기의 손정의 회장. 그는 투병 중이던 20대 후반 특유의 경영전략을 완성했 다. 손자병법에 자신의 생각을 곱했다는 뜻에서 ‘제곱병법’이라 이름 지었다. 손 회장은 기업 인수합병이나 중장기 사업 전략을 고민할 때 반드시 이 25자의 뜻과 일치하는지 자문한다 고 한다. [소프트뱅크 제공] 초기 소프트뱅크의 성장세는 눈부셨다. 창업 8개월 뒤인 1982년 5월에는 출판사업도 시작했다. 기존 소프트웨어(SW) 유통업에 이어 또 하나의 인프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사업을 시작한 데엔 사연이 있다. 당시 한 유명 PC잡지에 소프트뱅크 광고를 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잡지는 SW 유통사업도 하는 ‘아스키’라는 기업 소유였다. 한마디로 ‘경쟁사 광고를 내줄 순 없다’는 거였다.  나는 직접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오! PC’와 ‘오! MZ’라는 정보기술(IT) 전문지를 창간 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창간호의 80%가량이 반품됐다. 한 잡지에 매달 1000만 엔씩 적자가 났 다. 주력 사업에서 이 정도의 대적자라니, 결단이 필요했다. 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출판부장이다. 1억 엔 정도를 과감히 투자해 잡지를 일신해 보자. 3개월 뒤 에도 흑자가 안 나면 손 떼는 거다. 1억 엔을 투자했다 날리는 거나, 매달 2000만 엔씩 적자를 보며 질질 끌다 반 년 뒤 물러나는 거나 손해보긴 매한가지 아닌가.”  우선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수만 장의 독자 카드를 일일이 분석해 지면에 반영 했다. 매주 편집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정가를 680엔에서 580엔으로 내렸다. TV 광고까지 했 다. 효과가 곧 나타났다. 5만 부에서 10만 부로 증쇄를 했음에도 판매 3일 만에 매진이 됐다. 이후 출판사업은 계속 성장해 3년 뒤에는 9종의 잡지를 매달 60만 부씩 발행하게 됐다. #"료마도 나도 5년이다” 렇게 한시름 놨을 즈음 뜻밖의 재앙과 맞닥뜨렸다. 83년 봄 회사 건강검진에서 만성 간염 판정 을 받은 것이다. 상태가 위중했다. 의료진은 “길게 잡아도 5년이다. 그 이상은 생존을 장담할 - 17 -
  • 18. 수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  미친 듯 공부했다. 펄펄 끓는 열의로 회사를 세운 지 이제 1년 반이다. 딸은 겨우 갓난쟁이 다. 해야 할 일이 산처럼 많다. 빚도 잔뜩 있다. 무엇보다 나를 믿는 고객은? 동료는? 직원들 은?  진단받은 다음 날 바로 입원했다. 병상에서 울었다. 그저 살고 싶었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 면, 딸아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다면. 사실이 알려지면 은행에서 당장 융자금 을 회수할까 봐 병원에서 몰래 빠져나가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와중에도 회사 걱정을 하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그때 료마를 다시 만났다. 시바 료타로 소설 『료마가 간다』를 정독했다. 열여섯 시절 내가 큰 뜻을 품게 해준 바로 그 책이다. 부끄러웠다. 료마는 33세에 죽었다. 마지막 5년 동안 엄청 난 일을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 나도 5년이다. 그동안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그것을 하자, 목숨 바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를 불태웠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왜 사업을 시작 하는지,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되새겼다. 결국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였다. 딸의 미소, 가 족의 미소, 직원들의 미소. 그런데 누구보다 고객들이 웃어주면 좋겠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오 지, 얼굴에 흙 묻힌 꼬마가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그저 “고맙습 니다”라고 중얼거리며….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론은 역시 ‘자기만족’ 이었다. 멋진 말, 어려운 말 다 필요 없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 그것은 역시 디지털 정보 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이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게 하는 것. 오늘날 트위터처럼 말이다.   #자금 압박·직원 배신, 독서로 이겼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되살아났다. - 18 -
  • 19.  첫째, 병을 이긴다. 둘째, 사업을 지킨다.  말처럼 쉽진 않았다. 나는 이후 3년 반가량 입·퇴원을 반복했다. 일상적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할 수 없어 새 사장을 영입했다. 일본경비보장(지금의 세콤) 부사장이던 오모리 야스히코 였다. 나는 회장으로 물러앉았다. 그렇더라도 회사 일에서 손 뗄 생각은 없었다. 병실에 PC와 팩시밀리·전화기를 설치했다. 의사에게 혼나가며 원격 경영을 시작했다. 새 사업도 열심히 구상 했다.  위기가 이어졌다. 84년 자회사를 통해 시작한 상품 가격 데이터베이스화 사업이 실패했다. 타 격이 컸다. 은행 융자로 급한 불을 끄는 나날이었다. 86년엔 이른바 ‘소프트뱅크 사건’이 터 졌다. 신뢰해 온 유능한 임직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다. 독립해 회사를 차린다고 했다. 배신이었다. 나는 굴욕감을 누르며 끝까지 매달렸다. 그러나 잡지 못했다. 그들이 만든 회사는 결국 얼마 못 가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배신한 사람은 절대 성공 못한다. 그들 외에 도 여러 명이 경쟁사로 빠져나갔다. 고객들의 불만도 컸다. “그 사람 요즘 안 보이네. 의리 없 는 사람이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쇼크 요법으로 병 이기고 복귀 소프트뱅크가 창업 초기 발간한 잡지들.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 때마다 책을 폈다. 그렇게 읽 은 책이 4000여 권. 평생 먹고살 지식을 얻은 셈이다. 소프트뱅크 특유의 경영 전략인 ‘제곱병 법’도 이때 창안했다. 손자병법을 깊이 읽고 내 식대로 소화한 결과다. 핵심은 간단하다. ‘지 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이길 싸움에서 이기는 거다. 전투는 도박이 아니다. 과학이며 이론이 다. 또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긴다’. 인수합병(M&A)이 바로 그렇다. 일본의 경영자나 언론 관계자들은 대부분 그런 내 전략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종종 ‘모험’이니 ‘차익’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걸로 봐서 말이다. 각각의 딜이 얼마나 큰 비전에 따라, 과학적 분석하에, 긴 미래 를 보고 이루어진 것인지는 차차 얘기하게 될 터이다.  그 와중에도 내 병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84년 새 치료법을 만났다. 도라노몬병원의 구마 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만성간염을 급성간 염으로 변화시켜 인체 내부의 저항력을 일거에 끌어냄으로써 치료를 도모하는 일종의 쇼크 요법 이다. 지금은 훨씬 나은 치료법이 많겠지만 당시로선 길이 별로 없었다. 결과는 다행히 성공. 바 이러스 수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나는 86년 5월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날 기다리는 건 10억 엔의 빚, 그리고 핵심 임원과의 고통스러운 갈등이었다 - 19 -
  • 20.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⑦ 주식 상장 성공 M&A는 모험 아닌 과학 … 2만 페이지 분량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09.29 중증 간염을 이겨내고 일선에 복귀했다. 1986년 5월, 스물아홉이 코앞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투병 중 나 대신 사장으로 일한 이가 애초 약속을 뒤집었다. 자리를 내놓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사회를 통해 '임원 40세 정년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다. 40세가 넘은 임원은 재임용이 안 될 경 우 퇴사 절차를 밟게 했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한번 준 맘은 쉬 거두지 않는다. 재능과 인 품이 뛰어난 이를 보면 폭 빠진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아픈 기억들이다. # 될성부른 벤처에 공을 들여라  조직 문제만큼 골치 아픈 게 빚이었다. 무려 10억 엔. 다시 발명에 매달리기로 했다. 나는 미 국 유학 시절 다중어번역기 개발로 사업 밑천을 마련한 경험이 있다. 발명의 요체는 '불편과 불합리를 해결하는 것'이다. 마침 당시 막 자유화된 전화 서비스에 주목했 다. 고객이 새로 설립된 전기통신회사를 이용하려면 추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지역과 회사마다 요금이 다 다른데, 그중 싼 회선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을 개발하자.' 그렇게 결심했다.  함께할 사람을 찾았다. IT기업 포벌(Forval)의 오쿠보 히데오(57) 창업자와 뜻이 맞았다. 포벌 은 현재 일본의 대표적 IT기업이다. 최근에는 한류 스타 원빈씨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화제가 됐 다. 우승자에게 명품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를 2년간 무상 대여하는 '포벌 스칼러십 콩쿠 르'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오쿠보는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이다. 함께 제품을 개 발한 게 87년이니 벌써 25년을 쌓아온 우정이다.  우리가 개발한 NCC BOX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먼저 나온 유사품보다 훨씬 싸고 작은 데다 성능도 우수했다. 이 기기 덕분에 당시 일본의 통신 비용이 크게 줄었다. 회사엔 20 억 엔의 로열티 수입이 생겼다. 빚을 갚고도 10억 엔이 남았다. 나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때까지 우리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일본 소프트뱅크'였다. 나는 거기서 '일본'이란 단어를 떼 어냈다. 이어 미국 IT업체들과 적극적 교류에 나섰다. 당시 내가 열심히 부르짖은 게 '타임머신 매니지먼트'다. 거창한 명칭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당시 미국의 IT산업과 시장 환경은 일본을 한참 앞서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미국의 제품·기술·서비스를 들여오면 몇 년 뒤 일본에서 크 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 봤다. 열심히 태평양을 넘나들었다. 미국의 잘나가는 기업, 될성부른 벤 처에 공을 들였다. 그렇게 만난 것이 마이크로소프트(MS)와 노벨, 시스코시스템스다. # MS 업고 일본 컴퓨터 업계 평정  80년대 후반 일본산(産) 컴퓨터들은 회사마다 운영체제(OS)가 다 달랐다. 나는 언젠가 대부분 의 컴퓨터가 같은 OS를 탑재하리라 봤다. MS 윈도가 그중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90년을 전 후해 나는 MS의 빌 게이츠 창업자를 여러 차례 만났다. 일본 내에서 MS 소프트웨어(SW)의 독 점 판매권을 달라고 했다. 빌은 쾌히 응했다. 이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92년 MS가 내놓은 윈도3.1이 정말 일본 컴퓨터업계를 평정했다. 윈도상에서 구동하는 엑셀· 파워포인트 같은 SW 또한 덩달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일본 SW 시장 규모는 대략 한국의 스 무 배다. 인구는 두 배가 좀 넘을 뿐이지만 저작권 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MS의 독점 판매 권을 가진 우리 회사 매출도 쑥쑥 올랐다. 92년 1000억 엔이 넘었고, 93년엔 더 많이 벌었다. - 20 -
  • 21. 95년에는 MS와 합작회사인 '게임뱅크'를 설립했다. 빌과 나는 1~3개월에 한 번씩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됐다. 95년 말 그에게서 소포 하나가 왔다. 빌의 첫 저서 『미래로 가는 길(The road ahead)』이었다. 표지 안쪽엔 그의 사인과 함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마사, 당신은 나와 같은 승부사다(Masa, You are as much risktaker as I am)."  그렇다고 소프트뱅크가 MS만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니다. 90년 MS의 경쟁사인 노벨과 일본 합 작법인을 설립했다. 2001년 파산한 노벨은 당시만 해도 MS와 어깨를 견주는 SW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마지막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현재 구글 회장인 에릭 슈미트다. 94년에는 시스코 시스템스 일본법인에 투자했다. 지금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됐지만 20년 전엔 벤처 티를 막 벗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던 중 사업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94년 7월 주식 공개에 성공한 것이다. 주당 1만8900엔. 당시 최고가였다. 소프트뱅크는 단번에 2000억 엔의 거금을 쥐게 됐다. 쓸 곳 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수합병(M & A)이었다. # 인터넷 세상 안내할 '보물지도'를 찾다  당시 일본에서 M & A는 생소함을 넘어 부정적인 무엇이었다. 대물림이 전통이요 가업을 생 명처럼 여기는 문화다. M & A란 망한 기업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다른 이가 애써 일군 기업을 '빼앗아가는' 행위일 뿐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디지털 정보혁명의 원대한 꿈을 이루려 면 통상의 방식으론 안 된다. 주류 분야, 주류 시장으로 단번에 치고 나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병법의 최고봉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닌가. 이 모두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M & A다. 적 대적 M & A란 것도 있지만 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방식의 사업 확장을 일종의 도박이나 '손 안 대고 코 푸는 일'로 여기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M & A야말로 가장 치열한 숫자 싸움이다. 무엇보다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할지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나는 향후 시장을 60% 이상 점유할 가능성이 없는 회사, 이미 너무 많은 투자자가 침을 흘리는 회사, 현금 흐름(cash flow)이 위태로운 회사는 거들떠도 안 봤다. 비용 대비 효과를 가늠하기 위해 1만, 2만 페이지 분량의 시뮬레이션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야로 치자면 미래 금맥인 IT서비스, 그중에서도 '정보의 길목'을 장악하는 데 진력했다. 95 년 초 내가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를 1800억 엔에 사자 다들 "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딜이 없었다면 야후 투자도, 야후재팬 설립도,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내겐 막 열린 인터넷 세상을 안내해줄 '보물지도'가 절실했고, 최신 IT정보의 집산지인 지 프 데이비스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남들에겐 미친 짓이 내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 던 것이다. ◆손정의의 일본 귀화=손정의 회장은 1990년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손'이라는 성(姓)를 그대로 쓰려 하자 정부가 막았다. '한 사람만 쓰는 성을 허용할 순 없으니 일본 성을 쓰라'고 했다. 손 회장 부인이 나섰다. 본인이 먼저 성을 '손'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국식 성을 지킬 수 있었다. 손 회장은 귀화와 관련해 "두 딸이 생활하는 데 이런저런 불편이 없어졌고, 내 입출국 수속도 간편해졌다"는 식으로 심상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 21 -
  • 22.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⑧ 컴덱스, 지프 데이비스 인수에 성공하다 M&A는 전광석화가 기본 … 8억 달러 협상, 단 5분도 안 돼 끝내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04 1997년 8월 26일 손정의 회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컴덱스코리아 97'에서 김종필 당 시 자민련 총재에게 신형 노트북PC를 시연해 보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95년 8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덱스를 인수했다. 세계 최대 IT미디어 그룹인 지프 데이비스 도 사들였다. 당시 한 해 매출보다 몇 배 더 큰 거래를 성사시킴으로써 손 회장은 단숨에 세계 IT 업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나는 열아홉 살 때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다. '사업으로 이름을 알린다'는 20대 목표는 성공적 으로 달성했다. 30대 계획은 '1000억, 2000억 엔 단위의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1994년 만 36세에 주식 공개로 그 씨알을 마련했다. 남은 4년간 완성을 봐야 했다. 마침 인터넷 시대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폭풍을 뚫고 전진하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했다. 나는 세계 정보 기술(IT) 정보의 길목을 잡기로 했다. 아시아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기로 했다. 주식 공개로 마련한 돈은 2000억 엔이었다. 그 전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 시스코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함께 일하며 미국 시장을 들여다본 터였다. 나는 30대의 승부를 그 땅에서 보기로 했 다. 1년 중 8~9개월은 미국에서 살았다. 목표는 이미 정한 터였다. 세계 최대 IT전시회인 컴덱 스, 그리고 역시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인 지프 데이비스 인수였다. 컴덱스 인수를 처음 마음먹은 건 93년 가을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컴덱스 쇼에 갔다가 오너인 셜던 G 아델슨 회장이 회사를 팔 거란 소문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회장실을 찾 았다. 거두절미하고 "컴덱스를 사겠다"고 했다. "돈은 있느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 이름이 '뱅크(bank·은행)' 아닙니까. 왠지 돈이 무더기 로 들어올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넉살 좋게 답하자 아델슨 회장은 껄껄 웃었다. 나는 내처 "컴덱스를 사려는 건 단지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는 PC업계를 정말 좋아한다. 회사를 인수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와 나 사이에 진심이 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반전과 집념의 협상 드라마  1년쯤 뒤 마침내 컴덱스와 본격 협상에 들어갈 즈음 더 솔깃한 뉴스를 접했다. '미국의 세계 최대 IT미디어그룹 지프 데이비스가 매각 절차를 밟는다'는 기사가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것이 다. 지프 데이비스는 수많은 IT 관련 미디어를 생산하는 '정보 큰손'이었다. 여기서 발간하는 잡 지 PC위크는 세계 IT 종사자의 필독서였다. 광고 수익이 플레이보이나 포춘보다 많았다. 그에 - 22 -
  • 23. 자극 받아 90년 3월 이미 나는 PC위크의 일본 판권을 확보한 터였다. 나는 감히 지프 데이비스의 핵심인 출판부문을 사기 로 했다. 하지만 돈이 부족했다. 주거래처인 고교은행은 물론 일본의 어떤 금융사도 융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 에서 팀을 짜기로 했다. 모건스탠리를 고문으로, 프라이스 워 터하우스 쿠퍼스를 회계 감사로 기용했다. 이들은 내 무모한 계획을 비웃지 않았다. 신용 담보 융자인 LBO(Leveraged buyout) 방식을 제안했다. 소프트뱅크와 지프 데이비스의 수 익을 합하면 '1+1=2'가 아닌 '1+1=3'의 신용도를 갖출 수 있 다는 거였다. 모건스탠리의 주선으로 뱅크 오브 뉴욕·씨티은 행·체이스맨해튼은행 관계자들과 저녁을 했다. 일주일 뒤 세 곳 모두에서 OK 사인이 왔다.  94년 10월 말 나는 자신만만하게 입찰일을 맞았다. 한데 정오쯤 믿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투자전문사 포스트먼 리틀 이 단독 교섭권을 얻어 출판부문을 인수해버렸다는 거였다. 단독 교섭권이란 입찰 전 파격 조건을 제시해 받아들여질 경 우 전액 현금을 지불하고 회사를 가져가버리는 것이다. 지프 데이비스 측에서 유력 매수처인 소프트뱅크가 자금이 부족하 다는 루머를 듣고 거래를 조기에 타결해버린 거였다.  나는 우선 팀을 다독였다. "미국식 M & A를 제대로 배웠 다" "과정 습득 자체가 재산"이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하지 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상황이었다.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얼마나 잤을까. 불현듯 눈을 떴 다. 오후 4시55분. 입찰 마감까지 딱 5분이 남은 상태였다. 갑자기 머릿속에 불이 번쩍 했다.  '지프 데이비스엔 출판부문 말고 전시회부문인 '인터롭'도 있 지 않나. 인터롭은 컴덱스에 이은 미국 2위 전시회다. 그걸 사자!'  나는 곧바로 모건스탠리에 전화했다.  "지금 바로 지프 데이비스에 연락해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게. 인터롭을 살 테니 입찰액 계산을 위해 자정까지 마감을 미뤄달라고 말이야."  컴덱스를 곧 인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 더해 인터롭까지 사면 미국 IT전시 시장의 70~80%를 잡게 된다. 나는 모건스탠리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날 자정 인터롭 인수를 확정했다. 값은 2억 달러. 나는 모건스탠리에 10억 엔이 넘는 고문료를 기꺼이 지불했다. #'5분 독대'로 끝낸 3조원 빅딜  다음해 초엔 컴덱스 인수에 나섰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본사로 가 아델슨 회장 회장과 독대했다. - 23 -
  • 24.  "받고 싶은 금액을 말씀하십시오. 타당한 수준이면 흥정 없이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 상치를 벗어난 값이면 미련 없이 물러나겠어요."  나는 이어 "더 높은 값을 쳐 줄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꿈을 존중하고 더 큰 성취를 이룰 사람은 바로 나"라고 강조했다. 아델슨 회장이 값을 불렀다.  "8억 달러."  나는 말없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협상은 5분도 안 돼 끝났다.  컴덱스 측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빌 게이츠, 에커드 파이퍼 컴팩 회장 같은 거물들과 막역한 사이란 걸 알고 있었다. 시스코 본사의 사외이사이기도 했다. 회사 인수 뒤 나 는 기존 멤버를 한 명도 교체하지 않았다.  얼마 뒤엔 기어코 지프 데이비스 출판부문마저 가져왔다. 포스트먼 리틀의 테드 포스트먼 회 장과 역시 '단판 승부'를 벌였다. 그는 21억 달러를 요구했다. 나는 두말 않고 받아들였다. 95년 당시 소프트뱅크의 매출은 600억 엔이 좀 넘었다. 그런 회사가 1년6개월 새 무려 3100엔 규모 의 국제적 M & A를 성사시킨 것이다.  혹자는 이처럼 전광석화 같은 빅 딜에 아연실색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코 즉흥적인 결정 이 아니었다. 소프트뱅크는 M & A 전 온갖 데이터를 동원해 그야말로 가능한 모든 변수를 계 산한다. 이를 바탕으로 신속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수치(數値) 매니지먼트'와 '압도적 속도' 는 소프트뱅크 DNA의 원형질이다. ◆소프트뱅크식 팀제= 전사 조직을 9명 이하 팀으로 나눈 것. 경영학에서 말하는 관리자 1인의 통제 범위가 5~9명임 을 감안했다. 또 팀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회사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에 준해 판단할 수 있음 을 고려했다. 이 회사 팀장은 권한이 크다. 사장이나 본사가 모든 권한을 갖는 건 1000m 떨어 진 곳에서 권총으로 목표물을 맞히려는 것과 같다고 봐서다. 반면 현장 팀장에게 권한을 위임하 면 1m 앞에 서서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재량권이 큰 만큼 책임도 막중하다. 팀별 독립채산 제 형태로 운영해 실적이 부진할 경우 반드시 책임을 묻는다. - 24 -
  • 25.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⑨ 지분 34% 인수로 한 때 고전 적자 200만 달러 야후에 1억 달러 투자 … “일본 거품남” 비아냥 쏟아졌다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06 지난해 1월 손정의 회장이 중국 최대 인터넷상거래 사이트인 '알리바바' 창업자 잭 마와 일본 도 쿄의 한 행사장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2000년 1월 이후 알리바바에 8000만 달러를 투자해 지분 33.3%를 획득했다. 알리바바의 현재 시가총액은 나스닥 기준으로 191억 달러에 이 른다. 잭 마는 최근 "야후의 인수에 관심 있다"는 의사를 밝혀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블룸버그] 1994년 7월 소프트뱅크의 주식 공개 뒤 1년6개월간 나는 미국에서 총 31억 달러 규모의 인수 합병(M & A)을 진행했다. 덕분에 세계 최대 IT 전시·출판 그룹의 수장이 됐다. 하지만 내 입 장에선 이제 겨우 인터넷 세상을 헤쳐갈 보물지도와 나침반을 마련한 것이었다. 95년 가을, 막 인수한 지프 데이비스 출판 부문의 에릭 히포 사장에게 주문했다. "인터넷 시대가 본격화하면 없 어서는 안 될 회사에 투자하고 싶습니다. 지프 데이비스의 정보력을 동원해 물색해 주세요." 그 는 기다렸다는 듯 한 회사를 추천했다. "야후라는 벤처가 있습니다. 창업한 지 반년밖에 안 됐지 만 아주 유망해요. 실리콘밸리의 가장 믿을 만한 벤처투자사인 세콰이어캐피털이 이미 200만 달 러를 집어넣었답니다." 야후. 드디어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야후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공동 창업자 제리 양과 데이비드 파일로, 직원 여남은 명이 늦도록 일 에 몰두하고 있었다. 우리는 콜라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열 살 때 대만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는 제리 양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나는 곧 투자를 결정했다. 우선 5% 지분을 확 보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야후의 대주주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창업자들도, 기존 주주들도 내가 거액을 투자 해 대주주로 올라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주기 싫었 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음해 1월 다시 제리 양을 만 나 간곡하게 말했다.  "인터넷 비즈니스는 선점이 중요합니다. 라이코스, AOL 같은 경쟁사들이 속속 치고 올라오고 있어요. 하루빨리 더 큰 자본으 - 25 -
  • 26. 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해야 해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또 컴덱스와 지프 데이비스를 통해 전방위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어요."  5시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결국 내 뜻을 관철할 수 있었 다. 1억 달러를 더 투자해 야후 지분 29%를 추가 확보하 는 데 성공했다. 거래를 완료하기 전 나는 마이크로소프트 (MS)의 빌 게이츠, 넷스케이프의 짐 클락, 시스코의 존 챔 버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스콧 매닐리 최고경영자(CEO) 에게 e-메일을 보냈다. '야후의 대주주가 되려 한다. 하지 만 당신들 중 누구라도 적극 반대한다면 포기하겠다. 의견 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IT업계 생리를 잘 알았다. 이 후의 여러 비즈니스를 위해 이런 거물들과 척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모두 내 투자에 오케이 사인을 보 내줬다. 당시 야후는 연 매출 100만 달러에 적자가 200만 달러인 보잘것없는 회사였다. 그런 야후가 불과 한두 해 뒤 세계 인터넷 시장을 석권하리라는 걸 이들 중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투자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들은 나 를 '일본에서 온 거품남'이라며 대놓고 비웃었다. 나는 개의 치 않았다. 외려 서둘러 일본에 야후재팬을 설립했다. 소프 트뱅크가 지분 51%, 야후 본사가 49%를 보유한 합작 회 사였다. 나는 야후재팬을 아시아 최대 인터넷 포털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야후재팬은 서비스를 시작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나는 미디어산업에도 진출하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지 만 당시 세계 최대 미디어재벌은 호주의 루퍼트 머독 뉴스 코퍼레이션 회장이었다. 96년 4월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머독 회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일본에 오면 같이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2개월 뒤 정말 머독에게서 "도쿄에서 파티를 열려 하는데 인사말 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파티 전날 저녁, 도쿄 긴자의 한 고급 일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머독은 일본에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을 시 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기회를 낚아챘 다.  "나와 함께합시다. 일본엔 강력한 경쟁자가 많아요. 이들 과 싸우려면 최소 2000억 엔은 필요합니다. 내가 1000억 엔을 대지요." - 26 -
  • 27.  머독은 내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은 지 열흘 만에 합병회사를 설립했다. 머 독과 나는 417억 엔을 투입해 오분샤 미디어가 보유한 테레비아사히 지분 21%도 매입했다. 그러나 이 거래는 "소프트뱅크가 외국 자본과 손잡고 일본 미디어를 장악하려 한다"는 비난에 부 닥쳤다. 다음해 나는 지분을 미련 없이 재매각했다. 대신 머독과 함께 설립한 위성방송 J스카이 B 운영에 매진했다. 97년엔 또 다른 일본 내 위성방송 퍼펙트TV와 합병을 실현했다. 이로써 나 는 유통·인터넷·미디어·전시회에 이르는 주요 디지털 인프라를 손에 쥐게 됐다. MS·시스코 와의 합작, 미국 메모리보드 시장의 60%를 장악한 킹스턴테크놀로지 인수 등으로 네트워크와 테크놀로지 인프라 부문에서도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처럼 숨가쁜 투자와 M & A의 결과는 곧 '돈'으로 나타났다. 96년 5월 30일 야후 본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됐다. 97년에는 야후재팬이 일본 자스닥에 상장됐다. 두 회사 주가는 그야말 로 고공 행진을 계속했다. 99년 말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야후 주식 총액은 1조4586억 엔에 이 르렀다. 초기 투자액의 360배였다. 같은 시기 야후재팬 주식도 주당 1050만 엔까지 올랐다. 나 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E트레이드·지오시티즈 같은 실리콘밸리 유망 벤처에 잇따라 투자했 다. 재산은 점점 불어나 99년 가을에서 2000년 2월까지는 "손정의의 재산이 또 10억 달러 늘었 다"는 기사가 세계 언론에 종종 보도됐다. 단 사흘이지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업계 제1 부자 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 백화점에 가도 '이 건물을 통째로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쇼핑할 재미가 나지 않았다. 97년엔 지금껏 살던 임대주택에서 나와 40억 엔을 들여 새로 지은 3층 집으로 이사도 했다.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서 부와 명성의 절정을 누렸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닷컴 버블' 붕괴가 시작됐다. 소프트뱅 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고, 나는 사기꾼이란 오명을 쓰게 됐다. 세상과의, 나 자신과의 진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야후(Yahoo!)= 1995년 4월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생이던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가 창업한 포털. '야후'는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종족 이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세계 1위 검색 포털 자리 를 지켰다. 그러나 이후 구글에 밀려 현재 미국 검색 시장 점유율은 16% 안팎이다. 소프트뱅크 는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전인 2001년 야후 주식 대부분을 매각했다. 이 자금으로 일본 최초 의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다. - 27 -
  • 28. 주가 100분의 1 토막 ‘성난 주총’ … 6시간 경청이 주주를 감동시키다 2011-10-11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⑩ “배 앞을 보면 멀미 나지만, 몇백㎞ 앞을 보면 바다는 잔잔하다” 내 40대 초반은 화려했다. 19세 때 계획한 '1조 엔, 2조 엔 규모의 큰 승부를 한다'는 목표를 조기 달성한 셈이었다. 내 포부를 몽상가의 헛소리쯤으로 치부했던 이들도 그때쯤엔 고개를 끄 덕이며 박수를 쳐주었다. 1999년 소프트뱅크는 10여 개 자회사와 120개 이상의 손자회사를 둔 대그룹이 됐다. 야후를 비롯해 클릭 수가 세계 1, 4, 9, 12위인 사이트가 우리 소유였다. 세계 인터넷 트래픽의 50%가 여기서 발생했다. 매달 130종, 900만 부의 잡지를 찍어냈다. 한창 주가 가 오를 땐 재산이 일주일에 1조원씩 불어나곤 했다. 그해 타임과 뉴스위크는 각각 나를 '올해의 아시아 인물'로 뽑았다. 그런데 이듬해 3월 '하늘'이 무너졌다. '닷컴 버블'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것이다. 주당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을 넘나들던 소프트뱅크 주가는 100분의 1 토막이 났다. 내 재산 또한 7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앉았다. IT기업가들은 졸지에 범죄자 취급 을 당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야후의 제리 양,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창업자의 처지도 비슷했 다. 몇 달 전만 해도 '돈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빚이 재산 보다 더 많았다. '아차' 싶었지만 또 그럴수록 전투력이 치솟았다.   나는 99년 이미 주주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앞으로는 인터넷 사업에 올인할 거다. 그 외 사업은 모두 정리하겠다. 전화·컴퓨터가 그랬 듯 등장 5, 6년 만에 흑자를 내는 신사업은 없다. 우리도 한동안 적자를 각오해야 할 거다.” # 디지털 정보혁명, 꿈을 버리지 않다  아무리 그랬다지만 2000년의 버블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렇더라도 인터넷은 결국 부활할 거 란 내 믿음엔 변함이 없었다. 외려 기업 가치가 터무니없이 떨어진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 판단했다. 2000년 한 해에만 투자사를 600여 개로 늘렸다. 나는 이전부터 “예측 못할 앞날은 없다”고 믿어왔다. 배를 타고 가며 바로 앞을 보면 멀미가 나지만, 몇백㎞ 앞을 내다보면 바다 는 잔잔하고 뱃속도 편안해진다. 같은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나는 진짜 큰 승부,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에 초 고속 인터넷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 인터넷은 속도가 느리고 요금도 매우 비쌌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사업을 처음 구상한 건 인터넷 주가가 한 창 고공행진을 할 때였다. 돈이 없다고 지레 포기하긴 싫었다.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밀어붙이 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돈도 없다, 욕도 먹을 대로 먹었다, 겁날 게 뭔가.  계획을 밝히자 주위의 반대가 대단했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한다는 건 곧 일본 최대 IT기 업인 NTT에 정면 도전함을 의미했다. 임원들은 여기 덧붙여 “경쟁사 좋을 일을 왜 하느냐”고 - 28 -
  • 29. 따져 물었다. 맞다. 이 사업은 잘되면 나 하나 덕 보는 게 아니다. 야후재팬(소프트뱅크 자회사) 의 경쟁자인 다른 인터넷 기업들도 톡톡히 혜택을 보게 돼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찌할 건가. 야후재팬이 잘되면 그만인 거지, 경쟁사 잘되는 것까지 왜 걱정이야? 야후재팬 이용자만 싸게 주자고? 이런 멍청한 놈들!” # “당신을 믿는다” 주주 눈물에 이 악물어  내 뜻은 정말 그랬다. 소프트뱅크를 왜 만들었나.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고 싶어서다. 싸고 빠른 인터넷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을까. 혹자는 “그렇게 애 써봤자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누구 덕분이었는지 얼마 안 가 다 잊어버릴 것”이라고 했 다. 나는 대꾸했다.  “그럼 어떤가.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 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일본 개화기 정치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한 말이다. 그렇듯 막무가내로 달려드 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다. 안 그래 도 주가 폭락으로 주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총일,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주 주들 앞에 서서 그들의 비난과 타박, 호소를 마음으로 들었다. 시간을 이유로 말을 끊지도 않았 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했다. 그렇게 여섯 시간이 지나자 주주들의 표정이 한결 담담 해졌다. 한 할머님이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남편 퇴직금을 몽땅 털어 소프트뱅크 주식을 샀어요. 그게 99% 하락해 1000만 엔이 10만 엔이 돼버렸어요. 절망스러웠는데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당신 꿈에 투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믿을게요.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주주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박수로 나를 격려해주었다.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리며 나는 이 를 물었다. '저 마음, 저 믿음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 결과로 돌려드리겠다 '. ◆닷컴 버블(dot-com bubble)=인터넷을 중심으로 IT 분야에서 1995부터 2000년 초까지 이어 진 거품 경제 현상. 2000년 3월 10일 미국 나스닥에서 절정을 이룬 버블(거품)은 그 다음 날부 터 붕괴하기 시작해 단 6일 만에 주식가치의 9%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 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 29 -
  • 30.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⑪ “난 내 방식대로 세상을 본다” 사업 막혀 “분신하겠다”는 내게 … 공무원 “여기선 하지 말게” 중앙일보 | 이나리 | 2011.10.13 미지의 분야에 신규 투자할 때 작게 시작할까, 아니면 크게 밀어붙여야 할까. 열 중 아홉은 '작 게 간다'가 답일 것이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큰 승부를 걸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로 보자면 2001년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시작할 때가 그랬다. 일본 최초로 전국 규모의, 기존보다 5~10배 빠른 서비스를 선뵈는 일이다. 일본 최대 IT기업 NTT의 텃세를 이겨야 한다. 정부 정책도, 네 트워크도 미비하다. 경험은 없고 시장도 아직 활성화돼 있지 않다. 누군가는 "그럴수록 반찬 간 보듯 조심스레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그만 큼 경쟁자가 적다는 뜻이다. 당장의 시장은 작지만 곧 미래 산업의 핵심 인프라가 될 터이다. 압도적 공세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나는 폭풍처럼 몰아쳐 해일처럼 집어삼키기로 했다. 손정 의가 아니면, 소프트뱅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리라 마음먹었다. 주가 폭락에도 소프트뱅크 주주들은 '일본 최초 초고속인터넷 사업'이란 도전에 박수를 쳐주었다. 2000년 여름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사장실을 뛰쳐나가 사흘 만에 100여 명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통신 분야 엔지니어라면 무조건 데려다 놨다. 회사 조례 중 "거기 서 있으니 자네가 이 일을 하게" 하며 차출하기도 했다. 초고속인터넷 전문 통신업체 ' 야후BB'의 시작이었다(BB는 초고속인터넷을 뜻하는 '브로드밴드'의 약자다). # 2000년 포브스 선정 '올해의 비즈니스맨'  이때 한국의 도움이 컸다. 나는 "디지털 사업에서 한국이 나의 스승"이란 말을 종종 한다. 당 시 한국은 이미 ADSL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전면 도입한 상황이었다. 네트워크 설계부 터 장비 구매, 서비스 운용까지 한국 기업과 전문가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새 사업 준비로 바쁘던 2000년 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나를 '올해의 비즈니스맨'으로 선정 했다. 이유는 이랬다. '일본의 경기 회복 지연 속에서도 회사를 의욕적으로 키웠다. 파산한 일본 채권은행(현 아조라은행)을 인수해 벤처·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융자를 해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규 사업에 힘을 쏟았다.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하려면 NTT의 협조가 필수적이었 다. 법에 따라 NTT는 신규 업체에 기지국을 임대해주고 네트워크 구축도 대행해줘야 했다. 하 지만 커뮤니케이션은 힘들었고 이런저런 기술적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2001년 6월, 드디어 도쿄 시내에서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전국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임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NTT와의 협상이 어려운 데다 기술적 검증도 되지 않 은 상태였다. 서비스 출시 행사 전날, 나는 야후BB의 모회사이자 서비스 신청 접수를 대행할 야 후재팬으로 달려갔다. ADSL 접수 홈페이지 담당자를 직접 찾아 도쿄에서만 서비스 신청을 하게 돼 있는 공지 내용을 전국에서 가능한 것으로 고쳐버렸다. 큰 승부를 위해,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다.  다음 날인 2001년 6월 19일, 출시 행사가 열리는 도쿄 오쿠라호텔 연회장은 1000여 명의 기 - 30 -
  • 31. 자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로 붐볐다. 나는 분홍색 셔츠와 흰 바지 차림으로 당당히 무대에 올랐 다. 나는 선언했다.  "NTT의 IDSN보다 5배 빠른 초고속인터넷을 NTT 요금의 8분의 1인 월 990엔에 서비스하겠 습니다. 초기 설치비는 무료, 프로모션 기간 중엔 가정용 모뎀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엄청난 선언을 했건만 박수 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아랑 곳 않고 외쳤다.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많은 애널리스트들이 소프트뱅크는 곧 파산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 제 방식대로 세상을 봅니다. 이 사업은 성공합니다!" # 모건스탠리 "아무리 노력해도 적자" 전망 2007년 5월 한 일본 남성이 소프트뱅크 통신 서비스에 대한 광고 이미지로 감싸여 있는 기둥에 기대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2001년 출시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조기 안 착시키면서 단번에 일본의 주요 통신업체로 부상했다. NTT와 경쟁하며 초고속인터넷 2위 업체 가 됐고, 2004년 6월에는 일본 국토의 80%를 커버하는 유선전화 네트워크사 일본텔레콤을 인 수했다. 2006년에는 보다폰재팬 인수로 이동통신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블룸버그]  매스컴의 반응은 과연 비판 일색이었다. 모건스탠리는 "소프트뱅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최소 1억2000만 달러의 영업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달 랐다. 도쿄는 물론 전국 여기저기서 서비스 신청이 빗발쳤다. 두 달여 만에 신청자가 100만 명 을 넘어섰다. 문제는 네트워크였다. 8월 시작하기로 한 정식 서비스를 9월로 미뤘으나 답을 찾 기 어려웠다. 신청자들의 항의가 쏟아져 정상 업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가장 큰 이유는 NTT 의 지극히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나는 총무성(한국의 행정안전부에 해당)으로 달려갔다. 담당 과 장을 찾아 책상을 내리치며 피 토하듯 소리쳤다. - 31 -
  • 32.  "여기서 내 몸에 석유를 끼얹고 내 손으로 불을 지르겠소! 총무 성 당신들이 NTT에 똑바로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독점적 네트 워크를 무기로 이런 불법 행위를 일삼는 걸 묵인한다면 100만 고 객을 볼 면목이 없는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총무성 관료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주게. 제발 여기서만은 일을 벌이지 말아주게!"  나는 더더욱 악에 받쳤다. 그럼 여기 말고 다른 데 가서 죽으면 된단 말인가?  "무슨 소리요? 지금 그게 문제요? 당신들이 책상이나 차지하고 앉아 책임을 회피할 때 우리는 피가 마른단 말이오!"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우고서야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담당 과 장은 지친 목소리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댁 들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인허가권이 있지 않나. NTT 사 장에게 전화해 공정하게, 법대로 하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요청 했다. 과장은 그대로 했고, 덕분에 간신히 파국을 면할 수 있었다. ◆손정의의 '늑대론' =손정의 회장은 벅찬 목표에 도전하는 임직원들에게종종 '늑대론'을 강조한다. "호랑이나 버펄로 가 왜 늑대를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늑대는 한 마리로 안 되면 떼로 덤비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룹으로 에워싸 상대가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회사는 늑대 한 마리가 될 수도, 늑대 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덤비다 아예 죽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똘똘 뭉쳐 열정과 비전으로 몰아붙이면 언젠가 반드시 승리한다. 가족, 친구, 동료에게 존경받고 싶은 가? 그렇다면 늑대의 정신을 본받아 열정을 다해 일하라. ◆ADSL과 ISDN =2000년 당시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는 인터넷 전송방식으로 ISDN을 채택하고 있었다.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4배가량 빨랐다. 소프트뱅크가 이에 맞서 내놓은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 비스가 바로 ADSL이다. 진화한 ADSL은 전화 모뎀보다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다. 손정의 회 장은 "한국이 1990년대 말 ADSL를 적극 도입해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에 큰 자극을 받 았다"고 했다. - 32 -